
[1부] 폐허에서 꽃핀 희망, 해방 후 증권시장 재건의 발걸음
▲ 일제 치하 종료와 함께 멈춘 증권시장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우리나라 증권시장은 사실상 작동을 멈췄다. 일제가 운영하던 조선증권취인소가 제2차 세계대전 말인 그해 8월 매매거래를 정지했고, 1946년 1월 미군정법 법령 제43조에 의해 공식 해산됐기 때문이다.
당시 나라 전체가 정치·사회적 혼란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규모가 미미했던 증권시장의 재건은 요원해 보였다. 다만 조선증권취인소에 상장됐던 주식들이 옛 취인소 건물 주변에서 일부 장외거래되는 것이 전부였다.
▲ 증권구락부, 시장 재건의 첫걸음
해방 전 증권업계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한 시장 재건 움직임이 1947년 여름 본격화됐다. 증권계·금융계·관계 출신 인사 40여 명이 '증권구락부'라는 친목단체를 결성한 것이다.
창립총회에서 정관과 증권매매에 관한 자율규약을 제정하고, 송대순을 이사장으로, 전기영·김영기를 간사로 각각 선임했다. 증권구락부는 당초 증권거래소 설립을 시도했지만, 혼란한 정치·사회적 환경으로 성사되지 못하자 방향을 틀어 증권회사 설립부터 추진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9년 11월 22일 재무부 증권업 면허 제1호로 우리나라 최초의 증권회사인 '대한증권'이 탄생했다. 회원 대부분이 대한증권의 주주로 참여하면서 증권구락부는 약 2년 반 만에 자동적으로 해체됐다.
▲ 한국전쟁과 부산 피란지에서의 증권거래
대한증권 설립 후 경성방직·조선무진·조선철도·조선생명보험·조선면자·동아일보 등 6개 종목을 중심으로 소량의 실물거래가 이뤄졌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또다시 중단됐다.
1951년 1·4 후퇴 이후 피란지인 부산에서 지가증권과 건국국채가 활발히 거래되자, 대한증권은 부산사무소를 설치해 이들 증권의 매매를 취급했다. 이 시기 고려증권(1952년 8월), 영남증권·국제증권·동양증권(1953년 9월까지)이 차례로 인가받아 총 5개 증권회사가 주로 지가증권 매매를 통해 영업했다.
▲ 서울 환도와 조직화의 필요성
1953년 서울 환도 후 5개 증권회사 대표들은 조직적인 증권시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해 10월 16일 대한증권 사옥에서 협회 창립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11월 18일 '사단법인 대한증권업협회'로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다.
협회 정관은 "회원 간의 질서를 지키고 증권에 관한 제반 법령 및 규칙을 준수해 정부 시책에 협력하는 동시에 유가증권의 매매 기타의 거래를 공정히 하며 투자자의 보호를 도모하여 고도의 상업도덕을 앙양하는 것"이라고 창립 목적을 밝혔다.
협회의 성장세는 놀라웠다. 창립 당시 5개 증권사에 불과했던 것이 1954년 16개 사, 1955년 31개 사,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된 1956년에는 51개 사로 급증했다.
정준범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jb@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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