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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고인은 췌장암 판정을 받은 뒤 서울의 한 병원으로 옮겨져 투병 생활을 했지만 병세가 악화됐다.
광주로 돌아가고 싶다는 조 신부의 뜻에 따라 요양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최근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돼 이날 선종했다.
1938년 4월1일 광산구 본량면에서 출생한 조 신부는 1962년 가톨릭대학 1기생으로 입학해 1969년 12월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시민수습위원으로 활동했던 조 신부는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2006년 8월 38년간의 사목 생활을 마친 뒤에도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이사장, 광주·전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를 맡으며 통일과 민족화합, 사회복지운동에 주력했다.
또 2006년 8월 30년 동안의 사제생활을 마치는 퇴임 미사에서도 그는 "사회활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이 있어 가능했다"며 "이제 프리랜서처럼 자유롭게 활동하며 사회 정의·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조 신부는 군사정권 때는 시국미사, 김 전 대통령이 10년의 해외망명 끝에 1980년대 초 귀국해 광주를 찾았을 때는 환영미사, 대통령 당선 뒤에는 감사 미사를 지냈다.
이후에도 조 신부는 5·18기념재단 초대 이사장, 조선대 학교법인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소화자매원 이사장과 광주·전남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아리랑 국제평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통일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2008년 1월16일에는 고위 성직자 품위이자 교황의 명예 사제인 '몬시뇰'에 임명됐다. 국내 28번째.
조 신부의 빈소는 광주 북구 임동주교좌대성당 지하에 마련됐다. 이날 오후 2시 임동성당에서 옥주현 주교 집전으로 추모미사가 슬픔과 애도 속에 경건하게 거행됐다.
이날 미사에서는 고인이 남긴 세 마디 유언장이 집전을 맡은 옥현진 총대리주교 음성으로 낭독됐다.
"책, 기물 등은 소화자매원에 귀속한다. 혹시 남은 재산이 있을 경우 소화자매원에 귀속한다. 장기를 기증한다."
청빈한 생활상이 담긴 기물과 손때 묻은 책, 육신마저 세상에 돌려주고 싶은 고인의 뜻이 울려 퍼진 성당 지하강당에는 이내 숙연함이 감돌았다.
'민주화 증인' 조비오 신부 선종 소식에 지역 정치권도 깊은 애도와 함께 추모했다.
새누리당 광주시당은 이날 논평을 내고 "조 신부는 5·18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으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왔고 소외된 사람, 어려운 시민과 함께하면서 통일과 민족화합에도 노력했다"며 "그분의 뜻이 좋은 결실을 보이도록 정치권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광주시당도 성명을 내고 "민주성지 광주의 큰 별이 진 것을 시민과 더불어 깊이 애도한다"며 "더민주는 신부께서 못다 이룬 민주와 평화와 통일의 뜻을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국민의당 광주시당은 논평에서 "150만 광주시민과 함께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헌신의 길을 뒤따를 것을 다짐한다"며 "최근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내 5·18 사적 원상복원 문제도 조속히 해결하다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양래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조 신부는 어려운 시기마다 광주의 5월과 함께했을 뿐 아니라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늘 용기와 힘이 되신 분"이라며 "조 신부를 잃게 돼 가슴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장례는 3일장으로 치러지며 23일 오전 10시 김희중 대주교가 장례미사집전 하고 전남 담양군 천주교공원묘원에 안장된다.
장의위원회는 고인의 뜻에 따라 조화 대신 쌀을 받아 농민과 생활이 어려운 시민을 돕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온라인뉴스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