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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톡톡] '별셋' 출신 트로트 가수 김광진, "찐한 전우애를 노래한 '전장에 피는 꽃'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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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톡톡] '별셋' 출신 트로트 가수 김광진, "찐한 전우애를 노래한 '전장에 피는 꽃'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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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남성 트리오 '별셋' 출신 트로트 가수 김광진(74)씨가 뛰어난 가창력으로 건전가요 시장을 휩쓸고 만화 주제가를 불렀던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해 팬들에게 전했다.
전설의 남성 트리오 '별셋' 출신 트로트 가수 김광진(74)씨.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후배 가수들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우'를 부른 김광진은 가수로 인기를 누렸고 협회를 위해 오랫동안 활동해왔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가요계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당부했다.

별셋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인기 절정을 누린 그룹이다. 뛰어난 가창력으로 건전가요 시장을 휩쓸었으며 당시가수 김국환씨와 만화 주제가를 양분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1년 예그린 악단에서 마음이 맞는 멤버 네 명인 손정우, 안창걸, 박일순, 김광진이 모여 '사운드 포(Sound Four)'라는 이름으로 데뷔했다. 1972년 그룹명을 '별넷'으로 바꾸고 활동했으나 1977년 멤버 안창걸이 개인사정으로 탈퇴하면서 '별셋'이 됐다. 별셋은 TV유치원 하나둘셋, 딩동댕 7시다 등 어린이 프로에 출연해 큰 인기를 누렸다.

가수 생활 54년차인 김광진은 가수로 첫발을 디딘 계기로 1966년 KBS 부산방송국에서 전속 가수에 선발된 것을 들었다. 아리아 전속 가수를 10여명 모집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지원한 그는 500여명 지원자를 뚫고 가수로 뽑혔다.

"가수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음악가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그는 "아버지께서 목사님이셨다. 찬송을 부르면 합창단처럼 알토와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등 파트를 나누어 화음을 넣어 노래를 불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형님, 누나와 함께 화음을 넣어 아리아나 가곡 등을 불렀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김광진씨의 음악가족 내력은 재즈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딸 김미은씨를 통해서도 입증됐다. 그는 "딸이 어릴 때부터 음악성이 뛰어났다"며 "노래를 한 번 들으면 피아노도 안 배웠는데, 엉금엉금 기어올라가서 그대로 쳤다. 명곡보다 팝송을 많이 쳤다. 나중에 커서 버클리 음대에 입학했는데, IMF가 와서 힘들어서 들어오라고 하니까 1년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더라. 2년이 남았는데 1년 만에 학점을 다 이수해 버클리 음대를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지금 트랜스 사이베리아라는 락 밴드의 수석 주자로 활약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미은은 실력파 신세대 작곡가로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가수 티나 터너 등과 협업하기도 했다.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학교 콩쿠르 대회에서 중등부에서 1등을 하고 고등부에서도 대상을 받았어요. 당시 유도부에서 활동했는데 음악선생님이 목소리를 아껴야 한다며 기합을 넣을 때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지 말라고 주의를 줄만큼 저를 아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김해 문화제에서 이태리 가곡 '나노비아'로 1등을 했지요. 당시 가수 출신 군인이 3등, 부산 출신 여자 가수가 2등, 고등학교 2학년생인 제가 1등을 해 금 1돈을 부상으로 받았어요. 홍수환 선수가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했다는 말이 있듯이 '엄마. 나 1등 먹었어'라며 알렸어요."

-군 생활도 좀 독특했다고 들었습니다.

"1968년에 입대했습니다. 나라를 쾌활하게 지키자는 의미로 '쾌지나' 경연대회가 있었어요. 우리 부대에서는 제가 화음으로 코러스를 넣는 법을 가르쳤지요. 다른 부대와 차별화가 돼서 1등을 했습니다. 개인 콩쿠르대회에서 우리 부대 대표로 나가서 1등을 했지요. 1군 군예대(군악대)로 차출이 됐는데 군기가 너무 세서 견디기가 힘들어 원대복귀를 했어요. 복귀 후 중창단을 만들어서 제대할 때까지 재미있게 군생활을 했지요. 육군본부까지 가서 공연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그 당시 녹음했던 곡을 카세트 테잎에 옮겼다가 지금은 CD로 옮겨 보관하고 있어요. 그 때 군 동기들과 지금까지 51년째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때를 꼽으라면 군대생활 36개월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 만큼 아무 부담이 없고 걱정 근심이 하나 없었지요. 똑같은 나이의 친구들과 빈부의 차이 하나 없이 지냈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습니다."

-본격적인 가수 생활은 언제 시작했나.

"1971년 제대한 후 가수가 아닌 다른 직장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대구에 사는 누나가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가지고 온 '선데이서울' 잡지에 '예그린' 단원 모집 공고가 난 것을 보게 됐어요. 군복 입은 사진을 잘라서 붙인 이력서를 보냈는데 합격했지요. 70년대 초에 남북 협상이 있었습니다. 예그린은 남북교류를 위해서 만든 단체로 북한 가무단과 같은 기능을 했어요. 북한 박성철 부수상이 한국에 온 행사에 예그린 단원이 출연했습니다."

-그룹 '사운드 포'를 왜 별넷으로 이름을 바꾸었는지요?

"이후 예그린 단원 네 명이 '사운드 포'라는 그룹을 결성했어요. 비주얼이 좋고 무용이 가능하고 가장 젊은 그룹이라 KBS 주말 메인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있었어요. 이름이 없어서 그룹 명칭을 '사운드 포'로 급조했지요. 20대 중반으로 젊다보니 매주 고정 출연을 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외래어 사용이 금지되면서 '별넷'으로 이름을 바꾸게 됐어요."

-'별넷'으로 활동하면서 부른 노래들은?

"'전장에 피는 꽃', '두 마음' 등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건전가요나 군가가 주를 이뤘어요. 방송 스케줄이 빡빡했고, 드라마 '전우' 덕분에 1976년 가요대상을 받았지요."

-'별셋'으로 큰 인기를 누렸는데, 갑자기 활동을 중단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당시 원로가수 현인 선생님이 저를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천하셨지요. 무투표로 1988년 1월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고, 동시에 가수 회보 편집장을 맡았어요. 저를 예쁘게 본 현인 선생님은 수양아들로 삼으려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가수분과위원회 일이 생각보다 많아 1990년까지 그룹 '별셋' 활동을 하다가 내려놓게 되었지요."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TV유치원', '모이자 노래하자' 등 TV프로그램에 일주일에 14~15회 출연했어요. 또 가수들의 당면 과제인 출연료 협상 등을 지원했습니다. 또 매년 '가수의 날'에 원로 가수에 대한 예우를 1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인상한 게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또 지난 2000년 일본가수협회와 문화협정을 통해 한일문화교류를 시작했어요. 요즘 정치갈등으로 가까운 두 나라가 원수집안처럼 지내고 있는데, 문화교류를 통해 갈등을 풀어나갔으면 합니다."

-최근 음반을 발매했다고 들었습니다.

"김동찬, 박성훈, 정경천, 황기철 작곡가를 통해 음반을 냈습니다. 가수 이자연씨가 음악을 하라는 권유도 있었고요. 이번 음반을 내면서 계속 활동할 걸, 진작에 할 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내 노래를 알릴 곳이 없다는 게 현실이고 안타까웠습니다."

-많은 노래를 부르셨는데 기억에 남는 곡이 있다면?

"많은 노래가 다 자식들처럼 사랑스럽지만 그래도 병사가 동료 전사자를 다시 찾아오겠다는 내용인 '전장에 피는 꽃'이 가장 기억에 남고, 그 다음에 '이 남자', 신곡 '내사랑 안녕' 등을 꼽고 싶습니다. '내사랑 안녕'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데 항상 내옆에 웃고 있었는데 나는 강한척 하면서 속으로는 울면서 지금 인연이 이것뿐이라면 놓아주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인생이 다 그런것 아니겠습니까."


김성은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ade.kim@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