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27회)]
'서편제' 송화는 동생과 말없이 헤어지며
"恨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요…"라 했고
'얼씨구~' 각설이타령이 신명나는 것은
한많은 각설이가 부르기 때문이다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대중들의 정서를 잘 반영한다는 우리의 대중가요에는 ‘원한맺힌 삼팔선’이라든지 ‘한 많은 미아리고개’ 등 원과 한이 들어간 가사가 많다. 이런 노래들이 만들어진 시기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 중의 하나인 한국전쟁의 피해가 극심한 시절이었으니 원과 한이 들어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 부정적(否定的) 감정을 꼽으라면 거의 대부분 어렵지 않게 ‘한(恨)’을 꼽는다.
‘원한’처럼 원(怨)과 한(恨)은 가끔 합쳐서 한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원과 한은 조금 다른 감정이다. 문화심리학자 최상진의 연구에 의하면, 원이나 한이 생기는 사건이나 상황은 ‘부당하게 차별 대우를 받을 때’이다.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게 되면, 당연히 ‘분(憤)하고 억울(抑鬱)’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차별 대우를 한 대상에게 화를 내고 원망(怨望)하고 다시 되갚아주려는 강렬한 마음이 생긴다. 이 상태가 ‘원’의 상태이다.
상대방이 차별 대우를 하면 나도 차별 대우를 하면 화가 풀리고 분한 마음이 없어진다. 상대방이 나를 한 대 때리면 나도 한 대 혹은 두 세대를 때리면 통쾌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대로 자신이 당한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면 원의 감정은 풀린다.
하지만 차별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 많다. 예를 들면, 화를 내게 한 사람이 조직에서 상사라고 한다면 참을 수밖에 없다. 만약 같이 화를 낸다면 그 결과는 오히려 더 불리한 상황이 될 것이다. 또는 신체적으로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이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억울하다고 덤볐다가는 더 강한 폭력을 유발할 수 있다. 또는 화를 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을 받았다면 화를 표현하기보다는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다.
이런 분하고 억울한 감정은 매우 격렬한 감정이기 때문에 이 감정을 계속 마음속에 가지고 산다는 것은 먼저 자신에게 힘든 일이다. 격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정확한 이성적 판단을 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원만한 대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결국, 원을 풀던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격렬한 감정을 해결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에게 일부 원인이 있다고 자신을 달래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라든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하다”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쉽게 감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불현 듯 마음속에 떠올라 다시 격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런 반복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원의 감정이 쉽게 떠오르지 않게 마음 깊숙이 잘 간수해야 한다.
‘한이 맺힌다’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한은 원(怨)하고는 다른 상태이다. ‘맺히다’는 ‘맺다’의 피동사이다. ‘맺다’라는 동사는 ‘생겨나 매달리다’ 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슬이 맺히다’ ‘눈물이 맺히다’ ‘땀방울이 맺히다’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맺히다’는 ‘생겨나 매달려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매달려 있기 위해서는 얇은 막으로 쌓여있어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야 한다. 이슬의 경우, 얇은 막이 햇빛에 의해 증발되면 이슬도 증발한다. 눈물도 마찬가지이고 땀방울도 마찬가지이다.
한이 맺히게 되면, 더 이상 부당한 대우나 차별에 의해 야기된 격렬한 ‘원’의 감정이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외부로 나타나지 못하게 차단된다. 격렬한 감정을 마치 속에 있는 물건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보자기로 꽁꽁 싸매듯, 원의 감정도 보자기로 꽁꽁 싸매져 더 이상 마음속에 나타나 괴롭히지 못하게 일종의 ‘격리상태’에 놓이기 된다. 이것이 한이 맺히는 과정이다.

한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에는 한의 속성을 잘 나타내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아버지 유봉은 딸 송화가 소리를 안 배우고 도망갈까봐 일부로 딸의 눈을 멀게 한다. 유봉이 임종을 앞두고 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가 나를 원수로 알았다면 니 소리에 원한이 사무쳤을텐디, 니 소리 어디에도 그런 흔적이 없더구나” 만약 송화가 자기 눈을 일부러 멀게 한 아버지에 대해 분하고 억울한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유봉이가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송화는 이미 그런 감정을 보자기로 꽁꽁 싸서 ‘한’으로 맺히게 했다.
서편제의 끝머리에, 오랫동안 동생 송화를 찾아다니던 오빠 동호와의 만남이 슬프지만 애잔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져 있다. 두 남매가 밤새 소리를 함께 하고난 후, 아침에 서로 남매지간인 것을 밝히지 않고 동호가 첫차로 떠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주막집 주인이 송화에게 “왜 그냥 헤어지느냐?” 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해 송화는 “한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였지요”라는 알쏭달쏭한 대답을 한다. 아마도 ‘한을 다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진흙을 휘저어서 다시 흙탕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송화의 ‘한 맺힌’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성(詩聖)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 슬픔에 찬 밤을 눈물로 지새워 보지 않은 사람은 하늘의 힘을 알지 못 한다”고 했다. 비록 우리가 한이 맺힌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이것은 결국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유달리 신명이 있는 민족인 것은 그만큼 한을 경험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이 없어져야 신명이 나는 것이 아니라, 한이 있어야 신명이 날 수 있다. ‘각설이타령’이 신나는 것은 한 많은 각설이가 부르기 때문이다. 아무런 고통도 없이 살고 있는 부잣집 도령이 말끔한 차림으로 ‘각설이타령’을 부르면 아무런 감동도 없을 것이다.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는 기적이 우리의 삶의 묘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