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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난한 철학자의 자기혁명서, 세상을 양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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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난한 철학자의 자기혁명서, 세상을 양분하다

[왁자지껄 경제학] ③ 마르크스 <자본론> 출간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우리 사회에는 본인의 귀책이나 태만이 아닌 다른 환경적 이유로 인해 출발선에서 뒤쳐졌거나 아님 아예 출발선에도 서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도전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에게 패자부활전을 열어주는 것이 사람사는 세상이고 그것이 곧 경제의 역할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경제의 주체인 인간 그 자체에 시선을 향하려 하지 않는다면 경제학은 '비겁한 미래학'에 머물 것이다. 경제학의 역사에는 소위 엄청난 대사건들이 있었다. 그 사건들은 당시에는 나방의 작은 날갯짓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 경제학의, 아니 인류의 삶의 모습을 바꿔놓은 엄청난 태풍이 되었다. 글로벌이코노믹은 '왁자지껄 경제학'을 통해 그 우행(愚行) 혹은 선택의 과정들을 반추(反芻)해가며 출구없는 탐욕의 시대,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총칼을 쥔 자에게 권력이 집중되던 시절에는 소지(所持)만으로 범죄가 됐고 최근에도 한 사립대 교수가 강의 중 발화(發話)했다가 학생에 의해 국정원에 신고 당한 책이 있다. 지금도 한국 사회의 식자연(識者然)하는 사람들의 사상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종이이면서도 이를 무조건 외면하고는 그 틈에 낄 수 없는 모순덩어리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이 책의 주장과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론에 동의하는 혹은 반대하는 사람 모두에게 책의 주장은 끊임없는 논쟁거리였고 어떤 종교보다도 많은 순교자와 정서적 안티세력을 만들어냈다. 책의 이름은 <자본론>(Das Kapital)이다.
그랬다. 온 가족이 공장에서 일해도 하루 세 끼 먹을 돈을 받을 수 없던 그런 시대였다. 그 자신 지독한 가난으로 자식 중 5명이 빈곤 관련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한 가난한 지식인의 자기혁명서인 <자본론>은 그렇게 해서 씌어졌다. 칼 마르크스에게 철학은 세계의 원리를 이해함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즉 혁명의 문제였다. 그는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강도 높은 비판을 계획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 중 1권만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단채 1867년 출간된다. ‘사회주의의 성서’로 불렸고 성경 다음으로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 시장이 만능열쇠라고 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와 <자본론>을 이해하려면 근대 자본주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8C 이후 세상은 산업자본(가)이 주도한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당시 부르주아(bourgeois)라고 불렸던 ‘산업자본가’들이 세력화한다. 기득권 세력은 이 사실이 반가울리 없다. 절대왕정과 귀족, 상업자본가, 교회가 강력한 이너서클을 만들어 國富를 독점해왔는데 그 구조에 도전해온 것이다. 탄압했지만 이미 적잖은 세력과 일정한 부를 갖추게 된 산업자본가들이 그냥 당할 리 없다. 기득권 세력의 논리와 사상 체계에 맞설 대항담론이 필요하던 차에 1776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내놓는다. 내용은 대략 “세상 만사는 인간 욕망에 맡겨놓는 것이 좋다” “개인이 자기의 ‘이기심’을 추구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최종적으로는 사회 전체를 위한 최적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식이었다. 세상이 그 주장을 수용했고 국가의 시장 개입은 불필요하며 심지어 해롭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본주의가 세상의 규범이 된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한 가지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바로 시장 실패의 가능성이다. 애덤 스미스 역시 <국부론>에서 ‘시장 실패’와 ‘국가 개입과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 등을 설파했지만 산업자본가들이 이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교조화해버렸다. 그 결과 탐욕스러운 ‘야수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부녀자, 노약자, 어린아이들이 사고사, 과로사로 죽어갔다. 분노한 사람들이 공장주나 중간관리자와 자신들을 구별할, ‘노동자’라는 새 그룹을 만든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컸지만 이미 산업화, 자본화된 세상에서 기득권층의 논리에 반박할 근거가 부족했다.

■빈털털이 철학자 마르크스, 자본을 비판하다

그 때였다. 칼 마르크스라는 가난뱅이 철학자가 대영제국 도서관에서 밤낮으로 집필 작업에 매달린 끝에 1863년 <자본론>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로써 노동자 그룹은 자본가와 기득권 세력에 맞설 대항논리와 자신들의 사상 체계를 갖췄고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라는 새 경제시스템이 태어난다. 그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연방은 초기에 빠른 경제 발전을 이룬다. 선택을 주저하던 많은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산업자본가 세력은 당황한다. 세계의 절반이 사회주의 체제로 바뀌고 양 진영이 서로 경쟁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와의 경쟁으로 자본주의도 훨씬 건강해지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 체제 수립에 가장 기여한 책이 됐다. 위기를 느낀 자본주의 체제는 ‘야수적 탐욕’을 비록 아주 잠시지만 절제하기로 한다. 유럽 사회민주주의나 미국의 뉴딜 정책은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부의 재분배, 노동자 권리 강화 등 사회주의의 강점을 적극 수용한 뉴딜 이후 미국 자본주의는 안정감을 찾았다. 이후 미국은 황금기를 보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기간이 지속된다.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오히려 살기 좋았던 시절이다.

1992년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다. ‘시장 실패’와 ‘국가 개입과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은 외면하고 시장의 효율, 자율만 강조하며 국가는 경제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신고전학파’라는 새 경제이론이 세계를 주도하고 자본은 다시 탐욕을 부린다.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이 경제 위기에 내몰렸고 이들 나라에 미국이 주도하는 IMF(국제통화기금)는 구제금융을 하사(?)하고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들을 권고한다. 신자유주의다. 그들이 대단한 위세를 부린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거만한 어조로 이 새로운 사조를 찬양하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 과도한 사회보장제도로 힘들어하던 영국이 신자유주의(대처리즘)를 채택하고는 성장을 거듭하자 신자유주의가 우월하다는 사례로 돼버린다. 공산권은 몰락했고 자본주의 체제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대부분 평정된다.

■세상을 양분한 자본론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자본론> 등장 이후 양분된 세상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 결과만 보자.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졌다. 중산층이 몰락했다. 이윤과 효율 외의 가치들은 삶의 저 뒷전으로 밀려났다. 사회보장제도의 약화로 빈곤층은 최악의 상황에 몰린다. 설익은 이론들은 마르크스가 주장한 세계혁명도, 공산주의의 도래도 결국 일어나지 않거나 실패했으니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세계 경제는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굴러가고 있다.

그 탐욕을 방치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자본주의의 본산 미국에서, 그 우두머리인 오바마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다. 과도한 불평등을 개선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파멸할 것이라는 경고가 교황을 비롯한 지식인들에 의해 터져나온다. 신자유주의에 맹렬히 반대하던 폴 크루그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고 토마 피케티라는 무명의 프랑스 경제학자가 쓴 <21세기 자본론>이라는 책이 세계인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있다. 피케티의 주장은 간단하다. 자본 수익률은 생산소득 증가율을 지속적으로 넘어서는, 즉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으로 버는 소득의 증가 속도보다 훨씬 빠르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을 정도의 불평등 상황을 초래할 것이고,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사회의 근간이 되는 능력주의의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 아니 현실진단이다.

제도로서의 사회주의가 실패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마르크스와 <자본론>이 틀린 것은 아니다. 현실의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거래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작용하는 기형 사회이다. 수많은 내적 모순을 안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려면 <자본론>의 경고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던 최영미는 말했다. “마르크시즘 전에 칼 마르크스가 있었고 마르크스 전에 한 인간이 있었다.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 토요일 저녁 쏟아져 나오는, 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들을 집요하게, 연민하던…(중략)”이라고 말이다. 시인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처럼 <자본론>은 단순한 지적 허영의 과시물이 아니라 인간을 너무도 사랑한, 한 철학자의 변증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