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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매도,선물거래…자본주의 실험장서 벌어진 ‘꽃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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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매도,선물거래…자본주의 실험장서 벌어진 ‘꽃투기’

[왁자지껄 경제학]⑦1637년 네덜란드 튤립 광풍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사뮤엘슨은 실물시장과 무관한 특정집단의 자기 최면에 의한 금융현상의 대표적 예로 튤립 광풍을 거론했다.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군중심리를 강조했던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튤립 광풍을 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기 열풍이라고 했다. 이처럼 투자와 투기를 불편한 시각에서 논할 때 그 비판의 도마 위에 단골로 오르곤 하는 것이 1637년 네덜란드 ‘튤립 광풍’이다.


당시 튤립은 지금의 스마트폰이나 전기차 정도로 혁신적 상품이었다. 원산지가 파미르 고원일 것으로 추정되는 튤립은 자연에서는 키도 작고 색깔도 소박했지만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튼실한 체력을 갖고 있었다. 유목민들의 사랑으로 그들의 이동지역을 따라 전파돼 특히 페르시아에서는 이미 11C에 이 꽃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럽 수입은 상당히 늦었다. 1593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정원에서 튤립이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출신의 식물학자 클루시우스가 레이덴대학 교수로 오면서 식물원을 건립해 튤립을 재배했다. 꽃이 피자 사람들이 꽃들을 훔쳐갔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17C 후반 들어 튤립 열풍이 불었다. 네덜란드는 구름이 많이 끼고 축축하다. 여기저기 진창 투성이인 마을에서 집에 꽃을 가꾸어 아름다게 보이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꽃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문제는 이 사건이 단순히 대중의 특정상품에 대한 과도한 선호에 상인들의 영리행위와 대중의 투기 심리가 영합해 일어난 사건 정도로 간주하기에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무언가와 너무도 닮았다는 데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본주의의 실험장이었다. 1630년대 대호황을 누리면서 경제 성장률은 엄청나고 주가 및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해상무역의 최강자가 됐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돈을 벌기 보다는 투자를 통해 돈을 벌려고 한다. 금융 시스템이 발전, 투자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새로운 투자상품으로 주목한 것이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튤립이다. 사람들 사이에 튤립 광풍이 불면서 사회 전체가 흔들렸다. 튤립 구근은 6월과 9월 사이에만 매매할 수 있었다. 개화 시기 등을 고려할 때 당연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도입을 유독 반겼던 네덜란드인들이 소위 선물거래를 기획하면서 튤립 열풍은 집단광풍으로 확산됐다. 화훼 판매업자가 예정된 날짜에 미리 합의한 가격으로 튤립 제공을 약속하면서 연중 튤립 거래가 가능해졌다. 특히 판매업자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튤립 구근을 미리 판매하고 나중에 그보다 낮은 가격에 튤립 구근을 사들이는 ‘공매도’ 방식의 투기가 성행하면서 이 선물거래는 투기 수단으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당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도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1610년 이후 여러 차례 이를 금지하기도 하지만 이미 국민 대다수가 튤립으로 한 몫 잡아보려는 집단 광풍에 빠진 나라에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투기성을 인정했던지 그들 스스로‘ 바람장사’(windhandel)’라 불렸던 튤립 선물거래는 네덜란드인들의 마음을 빠르게 훔쳤다.

1634년경 이 튤립 투기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1636년에는 실질적 의미의 튤립 증권거래소가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에 생겨났다. 스코틀랜드의 찰스 매케이는 1841년 자신의 책 <대중의 미망과 광기>(Extraordinary Popular Delusions)에서 투기 거품 당시 구매가 2500플로린(당시 화폐단위)인 비세로이 튤립 구근 하나로 살 수 있는 목록을 작성했다. 밀 550ℓ, 호밀 1100ℓ, 와인 200ℓ, 맥주 4배럴, 버터 2t, 치즈 1000 리브르, 살진 소 4마리, 살진 돼지 8마리, 살진 양 12마리, 침대 하나, 양복 한 벌, 은제 컵... 적기도 힘들 정도로 높은 가격이 형성돼 있었다.

정상을 벗어난 속도는 부작용을 양산한다. 급격한 성장 시대를 살아가던 네덜란드인들에게 튤립은 신분상승 내지 인생 역전을 가능하게 할 만한 도구였다. ‘생선장수 아들이 거부가 되고 암스테르담 시장까지 역임했다’ ’유랑 걸인의 아들이 유럽 최고 부자 중 한 명이 되었다’는 등의 성공신화가 이미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자기억제와 합리적 관리를 내세우는 칼뱅의 교리가 지배했지만 이면에는 어떻게든 기회를 보아 큰 돈을 거머쥐겠다는 인간적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튤립 재배가 한탕주의로 돌변한 데는 튤립이 지닌 특이한 요소도 작용했다. 튤립을 키우다 보면 가끔 특이한 무늬를 가진 꽃이 피어난다. 후에는 바이러스 감염의 결과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찬탄의 대상이었다. 역사상 최고 튤립으로 알려진 전설적 튤립종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는 푸른색과 흰색 바탕에 빨간 불꽃 무늬가 꽃잎 끝까지 뻗쳐 있었다. 희한한 꽃일수록 바이러스에 심하게 감염된 것이었지만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다. 튤립은 꽃 필 때 변이가 심해 마지막에 어떤 꽃이 필지 예측이 어렵다. 게다가 새 구근을 만들어내기까지 6~7년이 소요된다. 따라서 멋있고 특이한 꽃은 가치가 높아졌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이게 아니다 싶은 생각을 한 몇몇 선지자들이(물론 이들의 직업은 튤립 중개업자였다) 투자에서 손을 뗐다. 게다가 한 귀족이 산 튤립 구근을 양파로 알고 그 집 요리사가 먹어버리는 일이 있었는데 관련 재판에서 재판관이 예상 외로‘ 튜울립의 재산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자 매물이 쏟아진다.



투기는 이게 문제다. 현재 가격까지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 그 수십 배 아니 수백 배 빠른 속도로 거품이 꺼진다. 단 며칠 만에 튤립 가격은 제로로 급락했고 빚을 내 튤립 투기에 몰두한 사람들이 모두 채무자 신세가 됐다. 특히 막판에 '상투를 잡은' 사람들이 더 손해를 입는 것도 지금의 주식 투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튤립 뿌리 하나에 인생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 멀지도 않은, 지난 노무현 정부 때 우리 사회에 불었던 부동산 광풍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당시 정부의 사활을 건 부동산 안정화 정책으로 광풍은 가라 앉았지만 여진은 여전하다. 그 때도 상당수 대한민국 사람들이 부동산 투자에 미친 듯 몰두했고 부동산 가격은 급등했다. 그 결과 실질임금의 정체로 지금 젊은이들이 정상적으로 월급을 모아 자기 집을 산다는 것은 더욱 힘들어져 버렸다. 직장인 절반이 월 20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동산 시장 활성화가 경제 성장의 전제조건이라는 황당한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하니 욕망은 끝이 없어 보인다.

튤립 가격 폭락 후 채무자가 된 사람들이 그제서야 튤립이 그냥 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노동이 아닌 투기로 인해 재산을 증식시키려는 탐욕이 개인과 사회에 엄청난 해악임을 깨달아야 할텐데... 출구없는 탐욕의 시대는 지금도 아무 반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