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이코노믹=장석용 춤비평가] 정은혜(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충남대 교수), 환상의 춤을 만들어내는 여인, 그녀의 안무작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늘 춤추게 만든다. 그녀의 일생의 역작이 단편 시리즈로 엮어진 매혹의 열편 춤은 정은혜의 내공과 저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판타지를 연출한다. 그녀는 창작무에 관한 한 우리 춤의 당당한 볼륨 업, 다양한 스펙트럼의 춤 활용 가능성 제시, 공명을 이끄는 춤의 격상, 과감한 예지적 예술성을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겸양지덕의 고수이다.
정은혜,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임무를 마무리하며 보여준 『대전십무』는 대전 거점 주변 지역의 풍습, 설화, 인물, 환경, 풍광에 걸친 소재로 대전의 본색과 미래 춤의 향방을 가늠케 만들고, 최상위 춤 예술로 격상시킨다. 그녀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창안한 열편의 춤은 대전 춤의 빛깔과 향을 각인시켰고, 강력한 울림으로 우리 춤의 미적 규범을 제시하였다. 그녀의 춤은 ‘멀고도 가까운’ 거리의 춤으로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춤으로 확증된다.
들뜸이 아닌 묵직한 중량감으로 빼곡히 채워 넣은 디테일, 무게감을 실은 안정된 자세, 우리 춤의 바람직한 전범(典範)을 제시하는 자신감, 모든 가변의 역동성을 동원한 『대전십무』는 영상, 조명 테크닉, 사운드, 빛의 적절한 분배로 중원의 대하 춤 건재를 읽게 해 준다. 국립극장의 현대적 테크닉 선호로 그 역할을 대신 한 듯 한 이 작품은 이 무용단의 힘을 읽게 해준다. 그녀는 명작을 직조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의 안무가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글로 형용할 수 없는 찰나적 예술의 가치, 장르간 유기적 순환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공간의 아름다움이 내려앉은 열편의 작품들은 화두를 깨친 정은혜의 격정, 이면의 쓸쓸함,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깔려있다. ‘사이의 가치’를 인정하는 작품들은 소통을 몰고 오고, 곧 바로 감동과 격정의 바람을 불러 온다. 흠결 없는 공연은 정은혜의 존재와 안무작들을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체취가 남아있는 안무작 열편을 살펴본다.
『본향(本鄕)』 (-태초의 빛을 찾아서): 남한의 정중앙 대전의 지정학적 위치와 문화를 생각해보는 도입부의 춤은 족보를 앞세운다. 대전은 족보의 고향이며, 전국에서 족보제작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한민족의 근원과 번영,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한 『본향(本鄕)』은 현대 창작춤의 정형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고, 빗소리로 사실감을 더하면서 시작된다. 영상과 사운드는 파장과 빛을 흡수하고 종이 내음, 묵향으로 무게감을 보여준다. 정은혜 춤의 정체성과 상징, 춤의 예형(藝型)이 족적(族籍), 전통에 기반함을 밝힌 작품이다.
『대전 양반춤』 (-양반이요, 양반! 대전 양반이요!): 군무 확장의 일인자 정은혜가 벌이는 고품격 춤은 검정 갓끈과 저고리 끈, 하얀 도포 자락이 절묘한 색감 대비를 이루며 군무로 이루어진 한량춤의 깊이감을 느끼게 만든다. 전통 한량춤 바탕에 대전의 선비이야기를 더하여 풍자와 해학이 어우러진 양반춤으로 만든다. 칠인의 양반과 앉아서 책 읽는 양반 팔인이 벌이는 이 춤은 동참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춤힘’과 품위로 시립무용단의 품위와 결부된다. 문화적 전통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이 춤은 양반의 예술적 동참과 형성자임을 보여준다.
『갑천, 그리움』 (-갑천의 전설이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감동의 쓰나미를 몰고 온 이 작품은 대전의 젖줄인 갑천의 전설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과 서정으로 담아낸다. 피리가 인도한 그곳, 양반가의 여인, 등 · 퇴장 시의 놀라운 조명 테크닉, 그리움을 불러내는 정은혜의 독특한 방식은 아리게 슬픈 모습들로 나타난다. 감동이 일어나는 것은 그 얼굴에 고향이 비치기 때문이다. 하늘엔 반딧불이 날고, 여인들 그리움의 덩어리로 남는다. 여인 아홉, 무사 하나, 하얀 그리움을 남긴 채 무사는 떠나고, 갑천 그곳에 사랑이 있었다. 정은혜의 기본 춤 구상의 사심없는 구성과 모티브를 가늠케 하는 작품이다.
『바라춤』 (–정토를 부르는 상생과 해원의 춤): 장엄미사에 해당되는 엄숙함을 달고 시작된 이 춤은 백색 솔로가 강한 인상을 뿌린다. 느림의 미학과 강약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이십 여명에 달하는 군무는 압도적 연기로 백년 역사의 수운교 공양의식 중 해원을 풀어낸다. 수운교 바라춤 원형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 구성된 이 춤은 진엄한 구음과 풍경 울음이 깊이를 더한다. 흔적 없이 소멸의 기운만 남기고 흩어지는 한국식 만다라 춤은 연꽃의 인상으로 남는다. 우리 춤의 지루함을 걷어내는 기술적 방법론을 제시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