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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 경제학] ⑬ 케인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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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 경제학] ⑬ 케인스 혁명

자본주의의 결함 지적한 자본주의자, 국가 역할을 논하다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전세계 화학 자동차 정유 산업이 미국과 독일 중심으로 굴러가던, 소위 중후장대공업의 전성기가 멀지도 않은 19세기에 있었다. 이 시기에 독일의 바이엘, BASF, AGFA 등 화학염료 및 제약사가 세계적인 화학공업회사로 발전했고 미국의 화학회사 듀퐁이 1차대전을 거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1920년대 공장을 짓고 합성고무, 나이론, 테프론, 농약, 도료 등을 대량생산한다. 듀폰이 GM의 대주주가 돼 GM을 키웠고 헨리 포드는 1913년 조립라인 방식의 포드시스템으로 자동차를 대량생산한다. 존 록펠러는 1882년 미국 석유 생산의 95%를 점유하는 석유왕이 됐다. 듀폰, 포드, 록펠러에 발명왕 에디슨, 강철왕 카네기까지 대활약하던 그 시기에 미국은 결국 1911년 영국을 앞지르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으로 등극했고 독일은 게르만 민족주의와 커진 국력을 앞세워 전쟁을 준비한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사진기술인가?케인스는외모에대한콤플렉스가심각했다.
▲사진기술인가?케인스는외모에대한콤플렉스가심각했다.

앞서 말한 미국의 다섯 거인들이 활약하던 시기에 “그의 이름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면 필시 경제학 서적은 아닐 것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 경제학에서 메가톤급 영향력을 지닌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명성은 소위 ‘경기를 탄다’. 세계 경제가 좋을 때와 나쁠 때, 디플레이션 우려가 있을 때와 그 반대일 때, 신자유주의가 팽배할 때와 그 기세가 꺾였을 때 등의 상황에 따라 케인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평가는 꽤 많이 달랐다. 특히 그 변심의 정도가 칼 마르크스나 애덤 스미스와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 즉 '애증이 교차한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컸다는 점은 그가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현대 경제학의 난제들, 글로벌경제 위기의 원인과 처방에서 이 못 생긴(사진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이성 앞에서는 더욱 심했다고 한다. 물론 동성애자이기도 했다) 경제학자의 이론이 관여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시작은 한편으로는 케인스경제학의 태동이다. 미국은 주기적으로 과잉생산에 의한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이것이 불황을 넘어 공황에까지 이르렀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을 맹신한 고전파 경제학자 어빙 피셔와 엘리트 집단인 하버드대학 경제연구소가 “곧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대중을 선동한다. 이자율이 낮았던 시대라 사람들은 소비가 경기 회복을 촉진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케인스는 생각이 달랐다. 수요(소비)가 있어야 공급이 생긴다며 당시 학자들과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소비는 이자율이 낮아진다고 살아나고 그래서 경기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득, 특히 가처분 소득에 절대적으로 영향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대공황의 처방은 소비를 살리는 것이어야 하고 소비를 살리려면 국민소득을 올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과도 들어맞는 생각이다. 국민 소비를 자극하려면 우선 정부가 지출을 많이 해야 한다며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에게 정부의 지출을 권유하는 편지를 썼다. 돈 항아리를 땅 속에 묻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파서 갖고 가게 해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편지에 썼다. 경제에 관심이 무척 커진 현대인의 판단으로는 별 것 아닐지 모르겠지만 소비를 절대소득의 함수로 생각하는 자체가 혁명적 발상이었다.
▲케인스는자본주의를옹호하기만한사람이결코아니다.
▲케인스는자본주의를옹호하기만한사람이결코아니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현실적 처방책을 제시했고 그것이 주효했기에 그의 주장과 그를 따르는 후학들의 등장, 그리고 세계 경제가 그를 배우려 했던 일련의 현상을 우리는 '케인스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후 지구촌은 대공황의 공포로부터 탈출했고 전세계적으로 케인지안들이 늘어난다. 케인스식 경제학은 대공황 이후 무려 50년 넘게 특히 자본주의 진영의 경제정책을 지배해 왔다.

지금은 어떨까? 미국에서 출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매우 비경제적이고 몰상식한 방식의 부동산 대출이 파도를 만들어 전세계를 강타하자 세계 경제가 허우적댄다. 소위 ‘망가진’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1920년대 대공황과 당시 루스벨트의 처방,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을 찾는다. 당시 정부가 재정정책을 통해 총수요를 관리해야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루즈벨트를 충동질했던 이가 케인스다. 시장에 맡겨졌던 자본주의의 주도권을 정부가 찾아왔던 이 사건 이후 세계는 글로벌 불황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메이나드’(케인스의 중간 이름)를 연호하다가도 경기 부양에 나선 중앙정부의 재정적자가 심해지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 긴축이 필요해지면 바로 ‘脫케인스경제학’을 외쳐대곤 한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이 최근 '양적 완화 정책‘을 펴면서 엉뚱하게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도 케인스이고 현대경제학으로부터 70년대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을 막지 못한 이유가 그의 이론 탓이라며 비판받는 사람도 케인스이다. 하지만 오해, 그것도 다분히 의도적인 오해다. 경제학자들, 특히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학자들은 케인스를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경제가 디플레이션 조짐을 보일 때 케인스의 이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없다. 디플레이션 때는 물가가 하락한다. 가격이 더 떨어지기를 기다리느라 물건을 잘 사지 않는다. 소비가 감소하고 승수효과로 인해 경기는 위축된다. 케인스는 이때 정부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시장에 돈을 퍼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모두 동원, 시장에 돈을 퍼부어 시장이 살아나도록 자극(stimulus)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공황때'일을달라!'며거리로나선사람들의모습.케인스와루스벨트는이런경우정부가나서야한다고생각했다.
▲대공황때'일을달라!'며거리로나선사람들의모습.케인스와루스벨트는이런경우정부가나서야한다고생각했다.


대표적인 케인지안인 前 미국 연방준비은행장 '헬리콥터' 밴 버냉키와 후임 재닛 옐런이 시중에 돈을 뿌려대는 이유다. 세계경제는 몇 차례 위기를 맞고 또 그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곤 했지만 하지만 대공황 때처럼 급속한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케인스 이론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케인스 이론은 미국에 수입되던 1940년경부터 이미 변질됐다. 케인스는 위기에 직면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극과 부양책을 말했지만 일부 경제학자들은 경기 침체기에도 정부가 계속 (경기를) 자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축통화인 달러화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이 원인이었다. 달러가 있는 한 미국은 아무 제약 없이 자극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크나큰 오류였음은 역사가 입증한다.

反케인스 진영의 또 하나의 공격 포인트는 정치다. 정치인이나 정치학자들은 그게 정치의 속성이라고 말하겠지만 정치의 대립은 통화정책에만 의존해 소위 ‘경제하려는 마음’을 자극할 수는 없도록 방해했다. 케인스의 처방대로 재정 확대 없이 통화만 팽창시켰더니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경기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케인스 반대론자들의 의도적 곡해다. 결코 케인스의 주장이 아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수요 부족을 일으키는 그 경향성에 주목해 소득재분배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주창했다. 경제학자들은 바로 이 부분, 소득재분배에 대해서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케인스 이론의 큰 지주(支柱)를 외면한채 겉으로 드러난 명제에만 집착하다 보니 ‘케인스 이론=중앙정부의 경제 개입론’이라는 등식이 완성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장기 호황은 각국 정부가 외부자본을 관리하고 고금리를 억제, 투자가 원활하게 이뤄지게 하고 내수시장 활성화에 주력하는 등 케인스의 이론에 입각해 경기를 적절히 조절한 결과였다. 하지만 호황이 장기화되면서 각 나라에는 공급 과잉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수출 압력이 증대하고 임금 상승으로 인한 국제적 자본이동 압박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나타났고 이 신자유주의가 아직까지는 현실 자본주의의 근간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리즘을 앞세워 세계경제를 풍미했던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다시 힘을 얻으면서 케인스는 다시 부활했다.

케인스는 대부분 경제활동이 합리적, 경제적 동기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야성적 충동의 영향도 상당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바로 이 야성적 충동이 경기순환과 비자발적 실업의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경제의 작동 원리와 정부가 취해야 할 역할에 대한 케인스의 분석은 불황과 이에 대응하는 재정 및 통화정책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면서 ‘보이지 않는 손’을 고수하는 고전파 경제학과 기업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경제학의 두 극단에 대한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실제로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를 표방한 나라의 정부 대부분이 적극적으로 케인스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전세계의 정치, 경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명한케인스바라기인경제학자하이먼민스키의명저<케인스혁명다시읽기>.
▲유명한케인스바라기인경제학자하이먼민스키의명저<케인스혁명다시읽기>.


물론 케인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에 반대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무조건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케인스의 주장이 항상 맞은 것도 아니었고 절대불변의 진리는 더더욱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수요진작을 통한 경제회복이 중요하고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공급의 확대없는 경제성장은 한계가 있다는 고전학파의 생각은 틀리지 않다.

그의 말대로 정부가 주도해 소비를 촉진하고 소위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돈을 찍어냈더니 통화량은 늘고, 물가는 올라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책 효과가 희석돼 실업률도 높아졌다. 대공황 직후 케인스는 100년 뒤의 미래는 ▲생산력이 8배 늘어 하루 3시간, 주 15시간 노동으로도 유지되며 ▲사람들이 경제 문제가 아닌 문화, 예술만 생각하고 ▲돈만 밝히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사회가 될 거라고 상상했다. 물론 틀렸다. 전세계의 경제력이 8배 이상 성장한 것은 맞지만 선진국과 개도국 간 분배 문제, 빈부 격차, 자본의 탐욕, 성장과 복지의 양립 등 자본주의의 제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을 빼고 현대 경제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학문적 발자취가 현대 경제의 곳곳에 묻어있다. 대공황이라는 유례없는 글로벌 경제위기에 직면한 경제학자의 선택은 현안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대공황이라는 발등의 불을 꺼야 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릴 경황이 없었다.

작금의 시대는 금융시장이 제 기능을 상실한 채 탐욕으로만 가득해 더이상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로는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경제를 시장에만 맡겼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깨달은 인류는 자본주의에 대한 새 패러다임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케인스가죽어야경제가산다고?아니!케인스를살려야인류가산다.
▲케인스가죽어야경제가산다고?아니!케인스를살려야인류가산다.


지금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살아있다면 어떤 해답을 내놓았을까? 케인스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내재적으로 결함을 가진 경제 시스템으로 간주했다. 케인스는 그의 명저 《고용과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의 마지막 장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체제가 완전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부와 소득을 임의로 그것도 불평등하게 분배한다는 데 있다"

또 다른 지점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심각한 소득 및 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심리적 기제가 존재하지만 오늘날처럼 심각한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없다" "유산 상속을 통한 부의 불평등은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탐욕을 그나마 저지할 수 있는 이론적 기제를 만들어 인류에 퍼트린 두 사람, 칼 마르크스와 존 메이나드 케인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