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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용풍우락] 16. 제구검풍(第九劍風) 무명세(無名勢)-(1) 무사의 묘비에는 아무 것도 적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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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용풍우락] 16. 제구검풍(第九劍風) 무명세(無名勢)-(1) 무사의 묘비에는 아무 것도 적지 않는다

[글로벌이코노믹 연재소설] 검법 용풍우락(106회)-칼날에 용이 뜨다
미국 LA에 살던 조천명 사범이 갑자기 귀국했다. 장례식에 꼭 방문해 주길 바란다는 편지를 받고는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날아 온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영정을 확인하고는 조천명은 놀라서 주저앉았다. 영정은 사십년 전에 돌아가신 우광 무사의 얼굴이었다. 돌아가신 우광 무사가 지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사십 여년을 더 사신 것이다. 수제자에게도 감춘 사부님의 사연이 궁금했다.

"자네는 왜 검도를 하려는 건가?"

"칼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무사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아는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자가 무사입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광 무사가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호랑이의 눈처럼 불이 났다. 가슴 속에 그런 열정을 가진 스승의 제자 훈련은 혹독했다.

"깨지는 아픔이 있어야 무사가 된다!"

참고 참으라고, 칼을 잡기 전에 책부터 많이 읽으라는 말씀. 검기술은 전혀 가르치지 않고, 예술과 인간을 바라보는 안목만 설파하였다. 한 번도 칭찬 해 주신 적이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몰아갔다.

"가난과 궁핍을 참고 모든 두려움을 이겨낸 후에야 염력이 쌓이고, 극한 상황에서 그것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림=허은숙 화백이미지 확대보기
그림=허은숙 화백
그러나 청년 조천명은 검술은 가르쳐 주지 않고, 인문 책만 강조하는 지도가 통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세련된 기술을 갖추고, 절공의 실력으로 유명해지고 싶은데, 세속을 버리고 미친 듯이 수련을 해야 한다는 말씀도 부담됐다. 무사가 인정받지도 못하는 현실은 미래가 없었다. 조선의 검법 철학은 턱없이 부족하고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조선은 숭문천무(崇文賤武) 정책으로 무(武)가 말라버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한양으로 물밀듯이 밀고 올 때 한양성에서 군사를 모으니, 겁내어 도망가고 그 수가 겨우 300명에 그쳤다고 한다. 중기 조선은 무사 철학이 없다시피 한 나라였다. 조선의 왕들은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무인들을 철저하게 홀대했다. 이 나라는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세계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검법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졌다. 칼은 빛을 잃었다. 사부인 우광 무사마저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무사가 버티기에 세파의 냉기는 너무 거셌다.

결국, 조천명은 검법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를 했다. 일 년 만에 휴가를 나와 보니, 우광 무사는 배에 복수가 찬 채, 한강변 판잣집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겨우 의사를 모셔다가 억지로 주사를 맞게 해 드린 것이 제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성의였다.

"선생님, 요즘은 제자 안 키우시나요. 찾아오는 이가 안 보이네요?"

의식이 돌아온 사부에게 넌지시 물었다.

"고된 수행을 하겠다는 제자가 없구나."

그 대답이 왜 그리 쓸쓸하게 들리는지, 미안한 감정이 울컥 일었다. 그리곤 뒤이어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너에게 한 번도 칭찬한 적 없었지?"

조천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는 다시 칼을 잡을 것이라 믿는다.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둠에 처한 이 나라, 이 백성들은 어찌 할 거냐! 너는 조선의 빛을 지키는 무사임을 잊지 마라. 빛이 다시 느껴지면, 그 때라도 다시 수련하면 된다. 나이 들어 뒤늦게 소명을 깨달아 큰 무사가 된 이도 있다."

‘죽기 살기로 모두를 버리고 수련을 하라던 그 분이셨다… ….’

사부님은 무사의 꿈을 포기한 제자가 얼마나 아쉬웠을까.

"넌, 천재가 아니다!"

어느 날 하신 말씀이다. 조천명은 오히려 그 말씀에서 사부님이 얼마나 자신에게 기대를 많이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좁은 생각의 벽을 깨뜨린 분. 자유를 알게 해 주신 분. 진리를 보는 법, 삶의 깊이를 바라보는 눈을 심어 주신 분. 빨리 기술을 안 가르쳐 줘서 잘못된 지도라고 오해와 원망을 했던 어리석은 제자는 기술을 가르쳐 졸렬해지기보다는 마음의 그릇을 갈고 닦는 참 공부를 가르쳐 준 선생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귀한 것임을 철이 들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뒤늦게 깨닫는다.

칼빛은 모양도 격식도 없다
오직 깨달음만을 발할 뿐이다


영정 속의 우광 무사는 열혈한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본다.

‘무엇을 바라보셨나요? 왜 그리 뜨겁게 사랑하셨나요? 남모르게 부활하셨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글 박신무 그림 허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