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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용풍우락] 17. 꽃잎이 바람을 가르다-(1) 개화(開花), 그 오랜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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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용풍우락] 17. 꽃잎이 바람을 가르다-(1) 개화(開花), 그 오랜 집중

[글로벌이코노믹 연재소설] 검법 용풍우락(108회)-칼날에 용이 뜨다
아무는 전철을 타고 한강 철로를 건너고 있었다. 출입문에 서서 창밖 물결을 바라보다가 문득, 창문에 비친 반대편에 앉은 여인이 눈에 띄었다. 긴 가방을 무릎 사이에 세워둔 여인은 챙이 넓은 모자로 살짝 얼굴을 가렸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 사이, 전철 안에는 강물 빛이 흘러들었다. 물빛은 세세하게 스며들며 반응하는 성질이 있는데, 여인은 강물 빛에 다른 사람들처럼 흐려져 묻히지 않고 유달리 빛났다. 물의 파동을 넘는 독특한 파동을 내었다. 고도로 훈련되고 집중된 감각이 드러난 것이다. 아무는 감각적으로 특이점을 알아챘으나, 남몰래 내면을 들여다보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아서 관심을 재빨리 지워버렸다.

아무는 팔당역에서 내렸다. 큰 날개를 편 검령산을 홀린 듯이 바라본다. 까마귀가 날카롭게 울며 지나가는 소리에, 하늘을 올려 보니 어디선가 꽃잎이 하나 날아온다. 아무는 무심히 손바닥을 내밀어 꽃잎을 받아든다. 의지하던 짝을 잃고 벚꽃 꽃잎은 홑잎이 되어 바람에 실려 왔다.

무사의 운명과 들어맞는 꽃잎이다. 찬란한 영화도, 명망도, 열정도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다. 칼빛은 꽃잎과도 같다. 한순간 활짝 피어 깨달음을 얻었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지만 남긴 채 사라져 간다. 피나는 수련도, 목숨 건 인연도 언젠가는 바람에 묻혀 버린다.

칼을 잡을 때
꽃잎 하나 날아갈
마음 공간을 남겨라


그림=허은숙 화백이미지 확대보기
그림=허은숙 화백
추억도, 인연도, 잘라 버리는 게 무사의 숙명인데, 그리움은 앞에서 흐르고 꽃잎처럼 과거로 떨구니 아름답다. 빈 마음에 다시 피어남은 신의 뜻이다.

아무는 팔당 다리 밑의 강변으로 향했다. 강무사가 바람에 휘날리는 꽃비처럼 검무를 추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떠나보내는 나무처럼 처연하다. 강무사가 들고 있는 장검은 아무가 잃어버린 몽운검이었다.

은둔 중인 고수가 천하제일 검이라는 평판이 마땅치 않은 한 검객이, 은둔하는 자는 실은 실력이 형편없는 사기꾼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우습게 여긴 나머지 그는 결투를 요구한다. 결투를 집요하게 청하는 검객에게, 심기(心氣) 엄중(嚴重)한 고수는 꽃가지 베어 보낸다. 자세히 들여다본 상대는 놀란다.

‘어라, 꽃가지가 잠자는 듯 그대로 숨 쉬고 있네!’
잘라낸 지 한참이 지났지만, 꽃잎은 곱게 숨 쉬고 있었다. 자태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벨 정도라면, 짧은 한 호흡 사이에 수차례 손길이 오갈 정도로 교감할 정도로, 칼의 깨달음과 기의 이치를 통달한 고수라는 뜻이다. 겨루지 않아도 결과는 뻔한 이치이다. 상대의 호흡마저 밀고 당기며 조절할 능력이 있는 고수를 어찌 이길 것인가!

굳이 살생을 하고 싶지 않던 고수는 하수의 어리석음을 꽃가지를 베어서 깨닫게 해준 것이다. 검객은 목숨 건진 기적에 놀라고, 고수의 배려에 감사하여 절로 무릎을 꿇었다.

강무사는 이제 자르지 않고 베는 단계에 이른 듯이, 살기 하나 없이도 꽃잎을 따라 시공을 넘나들고 있다. 바람이 꽃잎을 부르듯이 무언가 그리운 것을 칼빛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굳이 겨루지 않고도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이 수행자가 바라는 최고의 경지이다.

어떤 장벽도 구속도 눈물도 씻어 버리는 칼빛

별빛처럼 초롱초롱하던 눈이, 벽장에 걸린 녹슨 칼의 그림자처럼 흐려져만 가는 늙은 무사지만 칼빛은 더욱 빛나기만 한다. 머리가 반백이 되었지만, 마음의 칼날은 더욱 진실 앞에 살아 있다는 것이 눈물 나게 감사하다. 고된 방황으로 흐느적거리는 다리, 휘어져 가는 등, 낮달이 구름 한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칼에 기대어 살아온 인생이 서서히 깨달음의 둥근 달로 채워진다.

‘하늘의 소명을 알아가니, 내 욕심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사사로움 자르노라. 부디 평강한 길 열어 빛이 그 사이로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몽운검이 강무사의 손에 들어갔을까?”

머리속이 복잡해지는 순간, 강무사가 검무를 멈추고는 한 여인을 바라본다. 전철에서 만났던 여인이다. 강무사는 낚시 바늘에 잡힌 잉어처럼 눈물을 뚝뚝 떨구며, 눈만 꿈뻑거린다. 여인이 바다 물길 열듯 팔을 벌리니, 강무사의 목구멍에 걸린 낚싯바늘이 빠져나와 비로소 숨을 헉, 하고 쉰다. 상처가 깊었다.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나고도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글 박신무 그림 허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