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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삶이 아니라 ‘위대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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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삶이 아니라 ‘위대한’ 삶을 살자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18)]
‘위대한’ 삶이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억압에 맞서 싸우는 삶이자 의도하지 않더라도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싸움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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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야, 꽃피는 봄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입추가 지났구나. 늦여름 더위에도 수능 공부하랴, 자기소개서 쓰랴, 면접 준비하랴 하루하루가 빠듯하겠지. 그래도 무더운 날씨에 고생인 건 고3 학생만이 아닌 것 같아. 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소개해줄 테니 위안을 삼으면 좋겠다. 연일 폭염 때문에 노숙인과 가난한 노인들이 시원한 곳을 찾아 패스트푸드점이 북새통을 이룬다는구나. 그들은 커피가 3000~4000원 하는 카페는 부담스러워 엄두도 못 낸다고 해. 직원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그곳에 눌러 앉아 시간을 보낸다는구나. 시원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는 가난한 그들에게 기자는 '폭염 난민'이라는 슬픈 이름을 붙였더구나.
오늘 그루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철학'에 관한 이야기야. 물리학은 '물리'를 다루는 학문이고, 생물학은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고, 수학은 '수'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이름만 들어도 바로 연상할 수 있지만 철학은 이름만 들어서는 무엇을 다루는 학문인지 이해하기 어렵지? 그루는 고등학생이니까 아마 철학이 무엇을 다루는 학문인지 알지도 모르겠구나.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하는데, 그 말의 의미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수업 시간에 배웠을 거야. BC 5세기 후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행위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결국 철학은 '어떻게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이야. 오늘 편지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주인공은 아니야. 1925년에 태어나 호흡기 질환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5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질 들뢰즈(Jilles Deleuze)'라는 프랑스 철학자야.

들뢰즈는 '어떻게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철학의 근원적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거였어. 그루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자유롭게 잘 살고 있는데 또 어떻게 자유롭게 살라는 거지?'라고. 조지 밀러 감독이 만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라는 영화를 사례로 들어볼게. 이 영화는 핵 전쟁으로 인류가 절멸하고 소수만 살아남은 22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물과 기름이라는 자원을 차지한 '임모탄 조'는 시타델에서 절대적 신으로 군림하면서 폭정을 일삼아. 그래서 그가 가장 신임하는 사령관 '퓨리오사'가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이야. 반란을 일으킨 여전사 퓨리오사는 노예로 잡혀온 맥스와 협력해 가부장제 권력을 상징하는 임모탄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결말이야. 이 영화에서 주목하고 싶은 흥미로운 인물은 주인공이 아니라 임모탄에게 절대적 충성을 다하는 '워보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야. 그들은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전투 중에 임모탄을 위해 자살 공격도 마다하지 않고 대신 총알을 맞고 죽기도 해. 그들이 이렇게 용감한 이유는 임모탄을 위해 죽으면 전사들의 천국인 '발할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왜 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임모탄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할까? 왜 저들은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고 기꺼이 임모탄에게 복종하여 그의 노예가 되기를 원할까? 워보이들은 임모탄에게 복종하는 것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 아닐까?

'왜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그루야,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이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답하려고 평생 노력했어. 왜냐하면 '워보이' 같은 존재들이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야. 들뢰즈는 불쌍한 그들을 철학으로 구원하려고 했던 거야. 일본 천황과 그 주변의 권력자들의 욕망을 위해 기꺼이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던졌던 수많은 일본인들을 예로 들 수 있겠지. 또 히틀러에게 열광하고 복종했던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 학살하는 데 기꺼이 협력했지. 역사 속에서 우리는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남에게 예속되기를 원했던 무수한 사례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미 17세기에 이렇게 말했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한 사람의 허영을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예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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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보이들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증오하면서 자신의 삶 바깥에 어떤 신성한 가치(임모탄 조=신, 발할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복종하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야. 삶 바깥에 있는 가치를 추구할 때 현재의 삶은 하찮게 되고, 때로는 현재의 삶을 억압하고 증오하기도 해. 우리의 삶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신성한 가치는 신일 수도, 민족일 수도, 국가일 수도 혹은 직장이나 가족일 수도 있겠지. 들뢰즈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이런 것들을 목적으로 삼았을 때 억압과 비극이 발생한다고 생각했어. 들뢰즈는 그런 목적으로부터 해방돼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삶을 사람들이 살길 바랐어. 자유로운 삶이란 결국 자신의 삶이 유일한 목적이 될 때만 실현되는 것이란 것을 들뢰즈 철학은 말하고 있어.

그래서 들뢰즈는 억압된 욕망의 해방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려고 했던 거야.(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한 개인의 심리적 속성과는 전혀 다른 생성하는 힘 혹은 ‘역능’ 또는 ‘잠재성’이라고 할 수 있어. 이 이야기는 좀 복잡하고 어려우니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자.)
들뢰즈는 개인이 전체에 통합되지 않는 특이성(singularite)을 추구하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당부하지. 그럴 때만이 우리가 예속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특이성은 한 개체의 본질에 해당하는 ‘이-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루도 창조적인 자유로운 삶을 살면 좋겠어. 그루도 곧 대학에 가겠지. 대학에 가면 자신이 선택한 학과에 예속되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가로질러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으면 좋겠어. 그루가 좋아하는 물리학과 문학과 영화와 생물학을 섭렵하고 통합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낸다면 얼마나 멋진 삶일까?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개방하고 그 흐름에 따라 삶을 살 때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어. 한 곳에 예속돼 있을 때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해지는 거라고 생각해.

그루는 많은 돈을 벌거나 출세와 같은, 사회가 요구하는 세속적 '성공'에 너무 목매지 않았으면 좋겠어. 삶의 바깥에 있는 돈이나 출세가 삶의 목적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욕망의 해방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게 돼.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삶을 억압하고,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면 삶을 증오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될 거야. 그루는 워보이 같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그루가 '성공한' 삶이 아니라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위대한 삶이라고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위대한 삶은 어쩌면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삶일 거야.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삶을 사는 거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게 돼. 왜냐하면 욕망은 억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억압적 사회 질서를 해체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하기 때문이야.

1955년 미국 몽고메리 시의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은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타당하고 체포됐어.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짐 크로우법'이 당연시되고 있어서 인종차별이 심했어.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앞 네 줄은 백인 전용이었으며 흑인들은 뒤쪽에 있는 그들만의 유색 칸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해. 그런데 이 칸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백인들이 마음대로 표시를 옮길 수 있었어. 버스가 다 차기 전에는 중간에도 앉을 수 있었으나 백인들이 탈 경우 양보해야 했으며 버스가 만원이 되면 흑인들은 내려야만 했어. 그 당시 버스 이용 인구의 약 75%는 흑인들이었다고 해. 오후 6시쯤 하루 일을 마친 로자 팍스는 요금을 내고 유색 칸으로 표시된 좌석들 중 가장 첫 줄의 빈자리에 앉았어. 버스가 정류장을 계속 지나는 동안 앞에 있는 백인 전용 칸의 좌석들이 점차 차게 되었고 세 번째 정거장에서 몇 명의 백인들이 승차했어. 버스 운전기사는 두세 명의 백인 승객들이 서 있게 되자 유색 칸의 표시를 로자가 앉은 자리 뒤로 밀어내고 중간에 앉은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했어. 세 명의 다른 흑인들은 자리를 옮겼으나 로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 해. 운전기사가 왜 안 일어나느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했어. 버스 운전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자는 체포되어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어. 이 사건은 382일 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으며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은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져 나갔어. 이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참여하여 민권 운동을 이끌게 되었고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국 민권 운동의 시초가 되었어.

애초에 이 사건은 로자 팍스가 '계속 의자에 앉아서 가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소박한 행위가 그 출발이었어. 그런데 로자 팍스의 이 단순한 행위가 흑인들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는 위대한 결과로 이어진 거야. 물론 로자 팍스는 그 이후에도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나중에는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됐어. 로자 팍스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그루도 많이 알고 있을 거야. 사실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예수, 간디 같은 사람들의 삶도 애초에는 소박하고 단순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에서 출발했어.

결국 위대한 삶이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억압에 맞서 싸우는 삶일 거야. 그 싸움은 의도하지 않더라도 가장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싸움이 될 거야. 사실 가난과 억압의 고통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해방될 때 나의 자유도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해방의 첫걸음은 나의 삶을 긍정하고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긍정할 때 찾아오는 즐거움일 거야. 들뢰즈는 자유란 즐거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결국 자유란 즐거움의 다른 이름이야. 앞에서 예로 든 영화에서도 워보이인 눅스는 임모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을 긍정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짧지만 '위대한' 긍정의 삶을 살지. 그리고 임모탄의 아이를 생산하는 도구로 취급받던 '임모탄의 여자들'도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며 임모탄을 무너뜨리는 데 기꺼이 협력하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그들의 이런 행동과 연대가 시타델의 모든 사람들을 임모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돼.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도래하게 해.

그루야, 공부한다고 많이 힘들지. 그래도 그루가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그 '폭염 난민'들을 한 번쯤 생각하면 좋겠어. 어쩌면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일지도 모르니까.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 가장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명심하고 입시 준비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

2015년 8월 19일
달빛로에서 터기쌤 이유종(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