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19)] 인간의 존엄성
공부하기 전 참된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 필요사물은 가치를 지니지만 인간은 존엄을 지닌다
무더운 여름도 지나가고 선생님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구나. 이 비가 내리고 나면 더욱 날씨가 선선해질 것 같아. 그루는 이 시간에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겠지. 요즘 그루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선생님은 그루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지 먼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공부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을 때에만 그루가 방향을 잃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으니까. 또한 우리 사회를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을 이 사회에 제시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그루야, 선생님과 지난번에 공부했던 것을 떠올려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을 공부했다면, 심리학자 프랭클을 통해서 행복은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공부했어.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기인지 혼란스러울 거야. 그리고 지난 번 편지에 그루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선생님에게 의견을 물었었지.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생님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하지만 선생님은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의 관점을 갖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생각을 밝히길 좋아하지는 않아. 대신 그루가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러면 본격적으로 칸트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사물은 가치를 지니지만, 인간은 존엄을 지닌다.”
아마 칸트를 소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문장이 있다면 이 문장일 거야.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에 대한 인식은 칸트가 만든 큰 업적이야. 칸트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동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어.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동기에 문제가 있다면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고 했어. 결과만을 중요시 여기고 행동을 하다 보면 사람을 수단과 도구로 이용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결과는 어떤 행동의 목적과도 관련이 있지. 그러므로 목적을 추구하다 보면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된다는 거야.
예를 들어 보자. 선생님이 지금 그루에게 노트북으로 편지를 쓰고 있어. 노트북이 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야. 만약 노트북이 고장 나서 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버릴 수밖에 없어. 이처럼 사물은 이용가치가 있어. 휴대폰은 왜 가치가 있을까? 통화할 수 있기 때문이야. 즉 휴대폰은 “통화”를 “위해서” 존재해. 망치는 왜 가치가 있을까? 못을 박기 위해서지. 이처럼 사물은 자신이 아닌 외부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지. 만약 사람이 가치를 지닌 존재라면 어떻게 될까? 어떤 외부의 목적에 봉사하게 될 거야. 그루의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친구는 그루에게 밥을 사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선물을 사 줄 정도로 친절을 베풀었어. 그루는 그런 친구가 좋았지.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밥을 사주면서 한 가지를 부탁했어. “그루야, 사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반장 선거에 나가는데 나를 좀 뽑아줄 수 있을까?” 그때, 그루는 그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겠지. 왜냐하면 친구한테 받는 것이 있잖아. 그러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루의 기분은 어땠을까? 하는 것이지. 아마 그루는 기분이 나쁠 거야. 왜냐하면 친구한테 이용당한 거니까. 친구가 순수하게 그루에게 잘해 준 것이 아니고 그루는 “반장선거를 위해” 사물처럼 도구나 수단적인 존재로 이용당한 거니까. 그때 그루의 친구는 그루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 것이 아니고 가치를 지니는 존재로 대우한 거야.
이미지 확대보기그래서 칸트는 도덕적 행위의 목적은 그 자체에 존재해야지 외부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이번에는 그루가 남몰래 몇 년 동안 선행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신문사에서 남몰래 선행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루에게 인터뷰 요청이 있었어. 신문사에서 그루에게 질문했어. “그루 학생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선행을 베풀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네, 이렇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저에게는 큰 보람이었고 기쁨이었고 행복이었기 때문이죠.” 신문사 기자는 이런 그루의 답변에 칭찬을 했어. 그루에게 질문해보자. 만약 칸트가 살아있다면 이런 선행의 동기에 대해서 무슨 대답을 했을까? 선생님이 생각할 때에 칸트는 아마도 잘못된 동기라고 대답했을 거야. 행복을 얻기 위해, 기쁨을 얻기 위해 선행을 베푸는 것 역시 그 목적을 외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행동도 아니고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는 거야. 어쩌면 그루가 기쁨을 얻기 위해, 행복을 얻기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수단과 도구로 이용한 행동일 수도 있어. 물론 도와준 것은 맞아. 그러나 동기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그러므로 선생님이 생각하기에 칸트가 살아있다면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의 추구로 본다면 잘못된 동기가 있다고 설명했을 거야. 삶의 궁극적 목적은 삶 자체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삶의 궁극적 목적이 외부에 존재할 수 없어. 아마 그루에게는 어렵게 들릴지도 몰라. 원래 칸트가 어렵다고 처음에 말했었지?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엄밀성으로 돌아가보자.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라는 애제자가 있었어. 그가 말했지. “선생님은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말 잘하는 법을 가르치려한 것이 아니고 인생의 진리를 알려주시면서 무료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는 꾸짖었어. “그대는 간사한 사람이다. 그대가 나를 찬양하는 이유는 내 가르침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왜 꾸짖었을까? 제자가 소크라테스를 찬양하게 되면 소크라테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큰 것으로 보상을 받기 때문이야. 꼭 돈으로 돌려받는 일이 아니더라도 존경, 감사, 명예로 돌려받게 되지.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점점 더 사회에서 존경과 감사를 더욱 많이 받게 되겠지.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마치 그의 가르침의 목적이 존경과 감사를 받기 위한 도구로 타락할 수 있지. 소크라테스 또한 존경과 감사를 얻기 위해 진리를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고 사람들도 이용 대상이 되고 말아.
마지막으로 자살을 생각해 보자. 그루는 자살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 칸트는 당연히 자살을 찬성하지도 않았고 도덕적으로도 옳은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거야. 왜냐하면 자살은 우리 자신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야. 선생님은 아직 존엄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존엄이라는 말에는 그루의 몸은 그루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심지어는 그루 자신도 그루의 몸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존엄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그런데 어떤 이유로 함부로 내 몸을 죽이는데 봉사할 수 있을까? 삶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삶이 아무리 그루를 거부할지라도, 그루가 존엄한 존재라면 자살할 수 없어. 어찌 보면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 행복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 칸트의 생각대로라면 어떤 이유로든 자살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동이야.
이 짧은 편지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그루가 시간이 된다면 선생님과 만나서 이 주제에 대하여 집중 토론을 해보자. 어쨌든 칸트는 엄밀했던 사람 같아. 칸트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기에 어려워 보일 수도 있어. 그러나 확실히 칸트는 인간에 대한 고귀한 생각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여. 인간을 수단과 도구로 대하지 말고 목적 자체로 대우하라! 그루 자신은 왜 공부하지? 만약 스펙을 쌓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심지어는 행복하기 위해 공부한다면 칸트가 한 마디 할 거야.
“그대는 언제까지 자신을 가치를 지니는 존재로 대할 것인가? 도대체 언제까지 세상에서 쓰임 받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당신 자신을 존엄하게 대우하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만 편지를 줄일게. 힘내라 그루, 그리고 안녕.
2015년 8월 26일
달빛로에서 터기쌤| 이창우(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