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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82)] 따뜻한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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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82)] 따뜻한 말 한마디

아침이면 따뜻한 이불에 파묻혀 빠끔히 얼굴만 내밀고 꿈쩍거리기도 싫은 날이 늘어가는 것을 보니, 얼추 입동(立冬)이 지난 모양이다. 밤새 온기로 나만의 동굴을 만들어 놓았는데 선뜻 박차고 나가는 게 썩 내키지 않는 거다. 겹겹이 쌓인 노란 은행잎 사이로 단비가 종종걸음을 치는 오늘, 단풍잎 같은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의 옷깃에서, 늦가을의 정취가 우수수 떨어진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괜히 버둥거리면서 라디오를 듣고 싶어지는 날이다.

요즘은 스마트폰 어플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간편하게 라디오를 들을 수 있더라. 약 십년 전만해도 라디오는 아날로그 방식이 일반적이라, 조금만 투박하게 손을 움직일라치면, ‘찌지직-’ 엇박자를 내곤 하는 예민한 존재였는데…….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작은 상자에 귀를 기울이고 미세하게 움직이던 섬세한 손길. “됐다!” 겨우 맞추고 듣던 자정의 달콤한 목소리. 게스트가 나와서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프로그램 보다는, 아나운서가 차분하게 사람들의 삶을 읊조리는 게 나에겐 큰 울림이었다. 무심코 스쳐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따뜻한 말들은 적어두었다가 몇 번이고 되새기고 싶었는데, 급하게 메모지를 찾는 동안에 번번이 놓쳐버리기가 일쑤여서, ‘그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냐며 아쉬운 마음을 달랠 때가 많았다.

라디오는 감성을 자극하는 온기(溫氣)가 있는 상자였다. 난롯가에 모여드는 손길처럼 귀를 기울이곤 했다. 가끔 두 세 시의 새벽 공기를 쐬러 베란다에 서면, 건너편에 보이는 드물게 켜진 몇 가구의 불빛과 함께,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던 따뜻한 위안의 목소리. 곽재구 시인의 ‘새벽 편지’를 똑 닮은 읊조림이라면 이해가 갈까. 차가운 새벽 공기에, 겨울 앞에선 늦가을의 쓸쓸한 뒷모습에는 제격인, 그리고 냉혹한 세사(世事)에 휘둘렸던 우리들의 차가운 마음을 꼬-옥 안아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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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작가가 쓴 글인지 모르고 집어 든 책이었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꼿꼿하게 굳었던 청취자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녹여주던 따뜻한 한마디의 오프닝. 그것들을 모아놓은 느낌이랄까. 3시간 만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진솔하고도 담담한, ‘우리들 가슴에 깊숙한 뜨거움’과 만남을 갖게 해주는 이 이야기들은 작가 말마따나, ‘한 조각만 건드려도 전체가 움직이는 모빌’처럼 우리의 인생 어느 작은 한 부분을 변화시켜 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사람은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지켜온 옹골찬 아집으로 쉽사리 변화를 시도하기 어려운 우리들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가슴이 꾸물거리는 미동(微動)을 느낄 수 있다. 나도 이 책에 나오는 그 이처럼, 작은 습관, 발상의 전환으로 인생에 신선하게 불어오는 좋은 일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 달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주 작은 데서 비롯된다. 내가 ‘지금’ 하는 고민은, 나보다 앞서 세상을 살아간 누군가가 과거 ‘언젠가’ 한번쯤 고민했던 일이라는 것. 그래서 조금 더 현명하게 또는 어리석게 그 시기를 겪어낸 그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을 발판 삼으라고 진심어린 조언을, 따뜻한 밥 한 공기와 같은 위안을 건넨다는 사실에 영락없이, 가슴은 뜨겁게 반응한다.

정답고 포근한 한 마디의 말을 난로삼아, 뻣뻣하게 굳은 우리의 가슴을 녹여보자. 빛나는 ‘새벽 편지’가 되어 건네받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깊숙한 뜨거움과 만나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로 출렁’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벽편지 /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거리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한소진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아침독서편지 연구위원(덕신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