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2 10:41
아름다운 사람은 그 사람이 떠난 자리에 잔향(殘香)이 남는다고 한다. 비단 직접 대면(對面)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해당되는 일만은 아니다. 문학을 통해 작품을 만나고 그 문면에 흐르는 느낌이 좋아 이 글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 찾아보게 될 때 그렇게 작가와의 만남은 시작된다. 내가 만난 시인 중 참으로 고담하고 맑은 느낌을 주었던 사람 가운데 바로 윤동주가 있다. 얼마 전 영화 '동주'가 개봉되어 아픔의 시절을 살아낸 윤동주와 송몽규에 대해 재조명된 바 있어서인지, 서점에는 초간본 때와 같은 모습의 유고시집이 적잖이 진열되어 있었다. 백석, 한용운, 김소월 등 내로라하는 시인들과의 만남도 기대되지만 하늘도 맑고 바람도 솔깃한 5월 별을 사랑한 시인 윤동주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시인 윤동주와 교유(交遊)하면 그처럼 맑아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찬찬히 그의 시들을 음미해보련다.그의 시집을 펼치면 정지용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그가 만난 윤동주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언제나 나의 넋이 맑아짐을 경험한다"라고 한 문익환의 고백 또한 윤동주 시인의 순정한 성품과 정신을 알려준다. 그를 만나고 싶다.그의 시세계는 주로 기독교 의식, 동심지향의식, 고독한 자아의 현실인식과 자아의 발견, 자아와 현실의 갈등과 자아성찰, 현실극복의 가능성과 이상적 자아상의 성립이라는 범주로 논의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일제치하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기독교적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어린이 잡지를 구해서 읽었던 동시도 그와 같은 세계에서 살았으면 하는 시인의 바람과 함께 그의 작품 세계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고독한 자아로서 자신의 존재와 시대적 운명을 생각했고 그것이 '슬픈 족속'과 '슬픈 그림' 등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시인 동주는 일제 치하 식민지 현실 속에서 시를 통2016.05.07 05:43
하루를 자고나면, 하루만큼 푸르러지는 5월. 내 고장 강화도(江華島)는 온통 신록(新綠)으로 물들어있다. 물결치는 싱그러움을 그득그득 담아놓은 풍경이 황홀하리만치 아름답다. 싱그러운 대형 브로컬리같은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 초고추장처럼 기대어 앉아, 흠뻑 녹음(綠陰)에 취해 보았으면 좋겠다. 아아, 찬란한 이 계절을 마음껏 즐길 수만은 없는 아픔의 청춘(靑春)들이여! 떠나자. 어느 노래 가사처럼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자. 그런데 떠나면, 그리고 비우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무엇으로 다시 채워져 살아갈까? 긴장감이 다소 풀어진 요즘, 오히려 바빴던 나날들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내 몸과 마음이 돌보아달라고 아우성이다. 많이 지쳐있으니 조금 다독여달라고.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봄의 흥취를 자전거에 실어 꽃길을 달려본다. 살아 숨쉬는 물결 위에 고요히 정박해있는 작은 배, 이름 모를 갖가지 꽃과 나무들, 가냘픈 유채꽃과 탐스러운 철쭉꽃 다발이, 달빛 아래 한 데 어우러져 마음을 몰랑거리게 한다. 바람에 부대끼는 아름드리 나무들의 살랑거림은 솨-아 숫제 소나기가 내리는 대숲을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정지(停止).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과 같다는 표현이 정말이지 마음에 와 닿는 순간이다. 가지고 나왔던 답답한 마음들을 오솔한 이 길에 던져두고 냅다 달려야지. 한 시간 남짓한 자전거 여행으로 나를 만나고 돌아왔으니 나름 꽤 값진 시간이었다. 여행. 고향. 서울. 그리고 일과 사람. 난마처럼 엉킨 생각들 덕분에 세 번째 조우하게 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 오늘 나는 당신과 함께 ‘무진’에 가고 싶다.주인공 ‘윤희중’을 따라 세 번째 따라나선 무진행. 역시나 이번에도 헤매고 있다.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느낌이다. 무진에 오기만 하면 그가 하는 생각이란, 늘 이렇듯 엉뚱하고 뒤죽박죽인 것뿐이라더니 정말이다.아주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2016.04.24 06:33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머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유치환 中 로맨티스트 청마(靑馬) 유치환 선생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영도라는 여성에게 3년 동안 거의 매일을, 편지와 시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영도는 어느 정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는데, 나는 오늘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을 가진, ‘편지’라는 매체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편지, 어찌 연인들만의 전유물이겠는가. 밀어(蜜語)뿐 아니라 부자 간, 사제 간, 교우 간에 마음을 주고받는 편지의 힘은 대단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옷매무새를 다듬듯 나의 마음자리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는 편지. 나는 편지 안에 담긴 그 진심어린 속살거림이 좋다.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 있는 두 사람이 지면을 통해 조우하는 설렘. 편지에는 상대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이란 것이 소복이 담겨 있다.그런데 여기, 조선을 대표하는 대단한 한 학자의 편지가 있다. 학자이기 이전에 자식을 사랑하고 형제를 염려하는 마음은 한가지였던 한 아비의 ‘마음’이 소복하니 놓여있다.2016.03.25 12:32
성인이 되어 감사하게도 제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자 무지했던 경제 원리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으로만 여겨지던 경제학이 세상살이를 관통하는 주요한 부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무 약삭 빠른 것은 좋지 않더라도 복잡한 사회 속에 면면히 흐르는 경제 현상에 대해 정확히 인지할 수 있는 안목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경제학을 접근하는 방법인데, 사실 ‘경제’라는 단어가 가진 이미지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프와 수치가 난무할 것만 같은 왠지 딱딱한 느낌.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경제학, 인문의 경계를 넘나들다' 속에 나타난 경제 현상과 원리는 꽤 별스럽다. 씨름을 하듯 힘겹게 겨루기를 해야 하는 경제학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나가는 방식이 꽤 흥미롭다. 약 50가지의 경제 용어를 신화와 역사, 소설과 과학, 영화라는 각 분야에 쓱쓱- 버무려,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각 영역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절묘하게 융합해 놓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맨큐'의 10대 기본 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한 대목은 마치 심리학 책을 읽어 내려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눈에 보이는 현상뿐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본질에 다가선다.2016.02.28 11:30
바야흐로 1년의 시작이다. 교사인 나는 3월이 되어야 비로소 1년이 시작되는 것을 실감한다. 지금은 방학 중이라 학교가 텅 빈 듯하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교정 곳곳에서 쟁그랑 쟁그랑 꽃망울이 피어날 것이다. 풋내 폴폴 풍기는 교생선생님도 아닌 데, 은근히 3월이 두려워지는 것은 왜 일까. 작년에 담임교사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 새로운 아이들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설레기도 하지만 자못 두려움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지 않은가. 사랑에 빠지면 물불 가리지 않게 되는 것처럼, 올해 내가 만날 아이들과의 진정한 사랑 만들기가 이러한 두려움을 가볍게 떨쳐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아직도 ‘사랑타령’이나 하는 ‘사랑이 서툰’ 철부지 선생의 아이들. 때로는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나? 고민할 때도 있지만, 진심을 다하면 언젠가 그것이 전해질 것이라 믿는 조금 고리타분한 선생을 만날 우리 아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들일까? 각기 다른 환경에서 저마다의 성격으로 자랐을 아이들이 한 울타리에 모여 또 다른 가정을 만들어가는 일. 정현종 시인의 말마따나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일생이 오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인데, 34명의 각기 다른 일생을 마주한다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2016.02.13 07:35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누어먹는 따뜻한 떡국 한 그릇. 모두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의좋게 떡국을 나누어 먹은, 정답고 포근한 설 연휴를 보내셨는지요? ‘첨세병(添歲餠)’이라 불리는 떡국도 먹었겠다, 이제 실로 나이 한 살을 더 먹게 되었다. 되알지게 자리 잡은 녀석이 얄궂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올해 어떠한 일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금은 설레는 기분이다.더불어 2주에 한 번씩 서평을 쓰는 이 일이 내 삶에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설사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지라도-, 사실 이 글을 통해 만날 ‘당신’과의 만남 또한 묘한 기대감을 준다고 밝히련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새해 아침은 어떠했는지 자못 궁금하여 안부인사 먼저 건네는 수선을 떨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라 생각하는지라, 에세이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옷매무새를 다듬듯, 나의 마음자리부터 돌아보게 된다. 오늘 만날 ‘당신’에게 편안하고 참 좋은 느낌을 주는 글과 생각을, 그리고 책을 선사하고 싶다. 나의 바람은 이러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두러두런 나누어보자. 살아가면서 ‘사람’과 ‘인연’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2016.01.30 06:20
병신년(丙申年)의 새해가 말갛게 얼굴을 씻고, 그 고운 자태를 선보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새해의 마음가짐을 옹골지게 실천하고 있는가? 생각해보니 새해 벽두(劈頭)에 나는 꽤 굳은 결심을 했었다. 그 중 하나, ‘올해는 예쁘고 고운 말을 하며 웬만하면 화도 내지 말고 선한 마음으로 살아야지.’라고 말이다. 별 대단치도 않은 상투적인 다짐이지만, 사실 나에게는 꽤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게 말이다. 요 며칠 내가 느꼈던 주된 감정을 써 보았더니 “속상해, 우울해”가 불쑥 튀어나온다. 분명 나의 감정들인데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 감정들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썩 유쾌하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그 와중에도 ‘감사’와 ‘행복’의 순간이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그렇다면, ‘감정(感情)적이다’라는 게 꼭 나쁜 것일까? 왠지 ‘이성적’인 것과 반대되는 느낌을 주는 어감. 그도 그럴 것이 냉철하고 이지적인 것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감정에 무덤덤할수록 명철한 사람으로 보는 인식이 다분하다. 그래서 혹자는 감정을 성숙하지 못한 정신의 발로(發露)로 치부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불편해지는 것도 하나의 방증이리라.2016.01.15 15:24
모처럼 휴일이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시껄렁한 농담에 자지러지게 웃어버리는 일이 그토록 하고 싶었는데, 막상 몇 시간 해보니 슬슬 따분해지기 시작한다. 시름없이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멈춰 선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삼겹살’이 등장했으니, 기민한 말초신경이 절로 반응할 수밖에. 요즘 음식과 관련하여 매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기업인이자 요리연구가가 나와 정말이지 맛깔스럽게도 먹는다. 거참, 먹고 싶게……. 입이 심심하던 차에 구미가 당기니 웬걸, 엉덩이가 가벼워졌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빠끔히 열어 본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 이렇게 실망스러울 때가……. 없다. 당장 먹을 만한 게 없단 말이다. 할 수 없이, 뭘 좀 해먹으려다가 그걸 또 언제 해 먹나 싶은 막막함에 적잖이 낙담하여 앉아있는데, 얼마 전 서점을 서성이다 구미가 당겨 구매한 책 한권이 뇌리에 스친다. 헛헛한 마음을 채워 줄 맛깔스럽고 뜨끈한 책, ‘딸에게 주는 레시피’라는 작가 공지영의 에세이집이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오감의 풍요로움을 체험하는 것이 자극적인 맛을 느끼고 싶을 때 가끔 해 볼 만 한 일이라면, 시간과 돈을 차치하더라도 집에서 언제든 해먹을 수 있는 단출하고 정갈한 식단이야말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고담하게 채워주는 양식이 아닌가 싶다.2016.01.04 07:15
슥슥-. 개수대에서 엄마의 소리가 난다. 설거지를 하시는 엄마에게서 나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처럼 나의 일상에 너무나 당연하게 스며든, 이상스레 평온함마저 가져다주는 엄마의 소리. 퇴근 후 엄마와 다정한 몇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나는 뭐 그리 대단한 글을 쓴답시고 이렇게 방안에 틀어박혀 한참을 골몰중이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여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다’로 맺어지는 먹먹한 이야기.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르겠다. 누구 말마따나 이 이야기를 듣게 되면 누구든 ‘세상 모든 자식들의 원죄’에 대해 자백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라 생각한다. 저만치, 내가 끄집어 낼 수 있는 건 전부 기억 속에서 꺼내보려 노력하지만 몇 가지 잔상만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의 삶 속에 ‘엄마’가 주신 것들을 생각해보니 절로 참회가 나온다. 작고 사소한 것 같지만 대단하고 거대한 일들. 열 살, 스무 살에 느껴지던 ‘감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내가 ‘엄마’가 되면 사무치게 알게 될 일들. 마냥 어린 아이 같던 내가, 교사랍시고 아이들을 챙기다보니 순간순간 알게 된 엄마의 마음.2015.12.19 08:12
프롤로그. 묻다. 사랑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거리마다 기쁜 성탄을 알리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해 질 녘 어디선가의 반가운 회우(會遇)를 위해 종종걸음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니, 바야흐로 일련의 끝자락인가 보다. 추위에 여민 옷깃만큼이나 사랑하는 이들 간의 거리도 한결 가까워졌다. 연인들로 즐비한 12월의 거리는 추위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한껏 도도한 자태를 뽐낸다. 휑뎅그렁한 겨울나무에도 정성스레 고까옷을 입힌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 이쯤 되면,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나도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휴일 아침, 서점을 서성이다 이내 눈길이 머문 것은 사랑의 단상이 기록된 책이었다.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이라는, 최근 SNS에서 많이 회자되는 낯익은 얼굴이다. 서툴고 모난 마음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픔을 주고받았던 지난날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또한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어 담담하게 읽어 내려간 책이었다. 2015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에 주목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가치는 변하지 않을 사랑의 영롱함을 골몰하며……. '사랑'이 '현실' 앞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다.2015.12.04 05:54
중학교 학생에게는 고입이, 고등학교 학생에게는 대입이 화두(話頭)로 떠오르는 시기이다. 교사로서 청소년의 진로와 진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을 타고 났기에, 요즘 같은 시절에는 더욱 고민이 많아진다. 교사를 꿈꾸다가 진로를 변경한 혹자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교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교사는 학생들의 삶을 마주하며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기에 혹여나 한 사람의 인생을 잘못 건들까봐 두려워서, 차마 계속 갈 수가 없었다고 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이 딜레마에 빠져서 무진장 애를 먹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내 탓 인양 자책하며 괴로워했다.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간다. - 물론 아직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귀인(歸因)이며 어쩌면, 교사인 나의 욕심이자 오만의 발로(發露)라는 것을. 그 누구도 나의 소유일 수 없으며, 설사 어린 아이에게라도 감정과 생각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교사의 양심과 책임으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지도하고 그들의 삶을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내가 학생들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誤算)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그 사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무자비로 다그친다고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2015.11.21 09:06
아침이면 따뜻한 이불에 파묻혀 빠끔히 얼굴만 내밀고 꿈쩍거리기도 싫은 날이 늘어가는 것을 보니, 얼추 입동(立冬)이 지난 모양이다. 밤새 온기로 나만의 동굴을 만들어 놓았는데 선뜻 박차고 나가는 게 썩 내키지 않는 거다. 겹겹이 쌓인 노란 은행잎 사이로 단비가 종종걸음을 치는 오늘, 단풍잎 같은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의 옷깃에서, 늦가을의 정취가 우수수 떨어진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괜히 버둥거리면서 라디오를 듣고 싶어지는 날이다.요즘은 스마트폰 어플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간편하게 라디오를 들을 수 있더라. 약 십년 전만해도 라디오는 아날로그 방식이 일반적이라, 조금만 투박하게 손을 움직일라치면, ‘찌지직-’ 엇박자를 내곤 하는 예민한 존재였는데…….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작은 상자에 귀를 기울이고 미세하게 움직이던 섬세한 손길. “됐다!” 겨우 맞추고 듣던 자정의 달콤한 목소리. 게스트가 나와서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는 프로그램 보다는, 아나운서가 차분하게 사람들의 삶을 읊조리는 게 나에겐 큰 울림이었다. 무심코 스쳐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따뜻한 말들은 적어두었다가 몇 번이고 되새기고 싶었는데, 급하게 메모지를 찾는 동안에 번번이 놓쳐버리기가 일쑤여서, ‘그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냐며 아쉬운 마음을 달랠 때가 많았다.2015.11.06 09:49
“아, 내 말 또 무시당했어.”‘아차’싶은 순간이다. “미안해, 못 들었어.” 멋쩍게 웃는 내게 눈을 흘기며 투정을 부리던 아이의 귀여운 모습이 선연하다. 꽤 서운했나보다. “선생님!” 족히 3번은 불렀을 테니 저렇게 입이 삐쭉 나올 만도 하다. 아기 새들이 쫑알쫑알 지저귀듯 늘 어느 정도의 장난기 어린 웅성거림에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반응이 늦었나 보다. 아니면 수업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내 말이 너무 많아졌던 탓이리라. 어쨌든 수업을 하다보면 아이들의 반응을 살펴가며 함께 호흡을 해야 하는데, 종종 나는 이렇게 혼자만 신이나 버리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예전에 내가 그러한 사랑을 받았듯, 나도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니 최소한 그렇게 노력이라도 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찾아온 아이를 돌려보낸 적도 있으니 반성을 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말할 때는 생애 마지막 이야기인양 관심을 기울이라고’했던 모리 교수의 말이 인상 깊어, 실천하겠다고 다짐한 게 벌써 몇 번인데, 어쩌다보니 다시 또 입만 커져 있는 듯하다. 5월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사제동행(師弟同行) 책읽기’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어 부장이던 학생이 ‘함께 읽자’며 건넨 책 한권.2015.10.24 16:03
‘무심코’라는 단어보다는 ‘저의(底意)’라는 말이 썩 어울릴까.수백 장의 사진 중 사진가의 예민한 촉수(觸手)에 선택(選擇)받은, 단 한 장의 사진. 수많은 피사체 중 유독 사진가의 눈길을 머물게 한 매력적인 그것은, 카메라 앵글에 잡힌 뒤 또 한 번의 꿰뚫어보기(觀)를 거쳐 자신만의 색깔을 얻었을 것이다. 찰,칵. 평범한 일상이 예술로 재탄생하는 찰나(刹那)의 미학.민들레 홀씨 되어 날아가듯 후- 불면 흩어져 버릴까 두려운, 자주 깜빡깜빡하는 기억 속에 담아두기에는 어쩐지 미심쩍고 불안하리만큼 아름다운 장면들. 카메라 렌즈 너머의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고즈넉이 때로는 통렬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는다. ‘지금, 이곳’의 이야기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언제든 그대로 재생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진을 읽어 내기도 한다. 유심히,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진가가 담아낸 이야기들이 주절주절 생동한다. 이제 막 글을 배워 뭐든지 스스로 읽어내려 가고 싶은 아이마냥 더듬더듬하게나마 사진을 읽어본다.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이 손 안에 작은 렌즈를 소유한 시대, 사진은 강력한 소통의 도구이자 문화이다. 그래서일까. 출사를 나가 DSLR 사진기를 들고 세계와 소통하는 풍치(風致)가 꽤 멋스럽다.2015.10.11 10:23
‘엇! 나 왜 이러지?’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나는 잠자리 한 마리, 매미 한 마리도 냉큼 잡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야간 방과 후 수업 시간이었던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얼치기 매미 한 마리가 열린 창문 사이로 빠끔히 고개를 내민 적이 있었다. 수업 중이라 그 정도의 미세한 변화는 알아챌 리 만무해야 하건만, 하……. 아이들은 귀신같이 그 작은 파동을 포착해낸다.“매미다!” 최초 목격자는 우렁차게 소리친다. 이럴 때보면 실로, 매의 눈이다. 어린 시절, 술래잡기를 할 때, “얼음”이 “땡!”으로 바뀌던 그 찰나의 생동감을 알고 있는가. 가만히 앉아서 칠판만 바라보던 아이들에게 “얼음~땡!”을 선사한, 녀석의 빼꼼 인사. 덕분에 적막하던 교실은 온통 스타카토 잔치다. 잔잔한 호수에 물수제비를 뜨듯 아이들은 첨벙첨벙 여기저기서 소란이다. 본의 아니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한 매미는, 제 딴에도 놀란 가슴에, 앉을 자리 하나 잡지 못하고 야단법석이다. 엄지 손가락만한 매미 한 마리 잡겠다고 빗자루와 쓰레받기까지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 무섭다면서도 얼굴에는 장난기어린 웃음이 만개했다. 겁쟁이인 나를 대신해 매미를 잡으러 들어오신 남자 선생님과 입술 박치기를 하고나서야 매미는 기구한 생을 마감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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