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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90)] 다산, 그 위대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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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590)] 다산, 그 위대한 이름

다산 정약용은 누구인가. 남산에 가면 다산 정약용의 동상이 있고, 시청역 근처에는 다산연구소가 있으며, 남양주시 능내리 마현 마을에는 다산 정약용의 기념관과 생가, 묘 그리고 그의 거중기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전남 강진에는 다산기념전시관이 있다.

조선의 진보적인 사상가이자 사실주의적인 작가로 명망이 높은 다산. 그는 이처럼 우리나라의 수많은 학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흔히 ‘다산’ 하면 18년의 유배 생활과 함께 「목민심서」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그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강진 유배 18년 동안 5000권의 책을 쓴 실학자’라고 소개해야 더욱 정확할 것이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비롯하여 「애절양(哀絶陽)」 등의 시가 있으며 이외에도 다산은 수많은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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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2세에 진사가 된 후 1789년 28세에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규장각의 월과문신으로 뽑혔다. 이후 예문관 검열(정9품), 홍문관 정언(정6품), 사헌부 지평(정5품), 성균관 직강(정5품)으로 승진하면서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며 임금을 보필했던 인물이다. 1801년 신유사화가 일어나 형 정약종이 옥사하고 자신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 다시 전남 강진으로 유배된 뒤 18년의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1808년 47세가 되던 해 봄에 강진 만덕리 귤동에 있는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후 1000여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면서 18명의 제자를 가르쳤다. 이 산에 차나무가 많아서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일컬었다. 유배 초기 육경과 사서에 관한 연구서 232권을 저술했고, 그 후 새로운 정책을 논한 『경세유표』와 공직을 바로잡으려는 뜻을 담은 『목민심서』 등을 저술했다.

다산은 긴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식을 비롯한 친지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통해 자식들에게는 학문에 정진할 것을 격려하기도 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엄히 꾸짖기도 했다. 다산은 자식들에게 비록 벼슬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이 되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학문에 힘써야 함을 당부했다. 이외에도 논설문이나 상소문 등의 다양한 글을 썼고, 특히 1797년 정조 임금이 다산을 동부승지에 임명하자 이를 사양하며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밝힌 그의 상소문은 임금을 비롯하여 그와 정적 관계에 있던 신하들까지도 그 글의 빼어남과 자명한 논리에 탄복했다고 전해진다.

1762년 6월 경기도 파주군 초부면 마현,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나 1836년 2월 마현 자택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한평생 실학자로서의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수많은 저서와 글을 남겨 후학들의 귀한 본보기가 되었던 다산, 이 책은 그러한 다산의 생애에서 여러 편의 산문을 뽑아 그의 삶을 다시금 조명하고 있다. 위대한 실학자이자 청렴한 관리, 참된 목민관으로서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었던 다산. 그의 산문을 통해 다산 정약용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이동구 (사) 전국독서새물결모임 진로독서센터 연구원(광성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