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04)]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다

글로벌이코노믹

[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04)]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다

프롤로그. 묻다. 사랑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거리마다 기쁜 성탄을 알리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해 질 녘 어디선가의 반가운 회우(會遇)를 위해 종종걸음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니, 바야흐로 일련의 끝자락인가 보다. 추위에 여민 옷깃만큼이나 사랑하는 이들 간의 거리도 한결 가까워졌다. 연인들로 즐비한 12월의 거리는 추위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한껏 도도한 자태를 뽐낸다. 휑뎅그렁한 겨울나무에도 정성스레 고까옷을 입힌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 이쯤 되면,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나도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휴일 아침, 서점을 서성이다 이내 눈길이 머문 것은 사랑의 단상이 기록된 책이었다.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이라는, 최근 SNS에서 많이 회자되는 낯익은 얼굴이다. 서툴고 모난 마음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픔을 주고받았던 지난날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또한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어 담담하게 읽어 내려간 책이었다. 2015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에 주목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가치는 변하지 않을 사랑의 영롱함을 골몰하며……. '사랑'이 '현실' 앞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다. 그런데 사실 나에게는 순수하게 사랑 그 자체만을 고집할 패기나 용기도 없다. '사랑', 그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묻는다.

s#1. 사랑하지 않고 스쳐지나 갈 수도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춰 준/ 그 사람이 정녕 고맙다(양귀자 「모순」中)
한국의 독자들에게 '기욤 뮈소'의 작품은 이제 어느 정도 브랜드화된 것 같다. 믿고 보는 작가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의미다. 왜들 그렇게 '기욤 뮈소'의 소설에 환호하는가.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를 읽고, 나는 그 이유를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지만, 과거와 미래가 없는 인생은 존재할 수가 없는데, 이 소설에서는 '시간여행'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나들며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운명을 개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그때 내가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때 내가 ~했더라면'과 같은 회한에 젖어들 때가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젊을 때 지혜가 있다면, 나이 들어서 힘이 있다면'이라는 말이 큰 공감을 자아내듯, 우리는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서서히 알아가게 된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라는 명제가 흥미로울 수밖에. 작가 특유의 흡입력 있는 플롯 구성은 빠른 전개에 힘을 입어 몰입도를 한층 높여준다. 한편의 로맨스 판타지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랄까.

이미지 확대보기
이 책에서는 엘리엇과 그의 사랑하는 연인 일리나, 삶을 내어줄 수 있는 든든한 친구 매트가 등장한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만큼 엉켜있는 운명의 난마(亂麻). 이 셋의 운명 같은 만남을 통해 사건의 서막은 올라가고 거대한 일생이 운영된다.

엘리엇의 인생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더라도 그러하다. 엘리엇은 예쁜 일리나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다가 처음에 타려 했던 객차를 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사랑과 친구, 의사로서 인생의 소명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하루하루가 모여 미래를 만들고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일까? 정해진 운명이 우리의 노력으로 바뀔 수 있기는 한 것일까? 과연 운명이라는 게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일까?

30살의 엘리엇과 60살의 엘리엇. 낯설고도 낯익은 이 둘의 기묘한 만남을 지켜보며 나는 과거의 사람을, 사랑을, 그리고 나의 모습을 반추하게 되었다.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간 많은 인연들과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사람을 놓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와 비로소 깨닫게 되는 여러 개의 진실 앞에 나의 어리석음과 슬픔을 토로해 본다.

내게도 일리나와 같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남아,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가. 또한 만사를 제쳐두고 나를 위해 몸을 던져줄 매트와 같은 사람이 있었던가.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떠나보내야 했던, 인생이 한참이나 남은 것처럼 대하다가 놓쳐버린 소중한 인연의 끈들은 누구였는가. 문득 그리워진다. 나에게도 다시 돌아가고픈, 다시 돌아간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을, 그러한 순간이, 아마도 하나쯤 있을 것이다.
s#2.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유치환 「낙엽」中)

2006년 미래에서 온 나이 예순의 엘리엇의 지혜와 1976년 나이 서른의 엘리엇의 힘이 한 군데로 합쳐졌다면, 후회로 점철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순 살의 엘리엇을 서른 살 엘리엇에게 데려가줄 10개의 알약. 안타깝지만 이 세상에는 그러한 신비의 묘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면 기억 속의 그 때로 나를 데려가 줄 매개체가 무엇이든 필요했다. 그러다가 한참만에야 떠오른 게, 한 때 유행처럼 번지던 싸이월드라는 공간이다. 비교적 나의 과거를 고스란히 보존해 주었을 공간. 빛이 바랠 만큼 오래지는 않았지만, 대개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을, 그 당시 내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그리고 사건들을 충실히 담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2006년의 엘리엇이 알약을 먹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돌아간 과거 속 오늘처럼, 자못 쓸쓸하고 설레는 기분이다. 엘리엇은 사랑하는 여인 일리나를 구하기 위해 이별을 감행한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이별을 지켜보며 애초에 왜 사랑하는 이와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애초에 일리나와의 약속을 지켰더라면 이런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숫제 화를 내고 싶었다.

서른 살의 엘리엇에게는 난 데 없는 우격다짐일 테지만, 예순 살의 엘리엇은 한순간의 선택으로 일리나를 떠나보낸 뒤 회한으로 산 30년을 되돌리기 위해, 그녀를 살리기 위해, 큰 결심을 내린다.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일어날 일은 기어코 일어나고야 마는 걸까. 운명은 얄궂게도 동일한 결과를 낳아버렸다. 더욱 더 가혹하게. 원치 않는 이별 앞에 자살을 감행한 일리나와 사랑하는 이를 잃고 바닥을 치고 마는 엘리엇. 그리고 오해 속에 등을 돌린 매트까지. 하나의 선택이 불러오는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세 사람의 인생을 뒤죽박죽 바꾸어 놓았으니 말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서른 살의 엘리엇과 한 팀이 되어 시간과 운명을 거스를, 대 반역을 모의한다.

s#3. 사람들은 언제나 기회가 있을 거라 믿지만 노력해서 얻으려 하지 않는 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는 때로 시간을 돌이키고 싶다. 비로소 살아온 날들을, 그 의미를, 그 선택의 결과를 다 알아버린 후 이므로. 엘리엇은 자기 삶의 여정 중 일리나에 관한 한, 그 결과를 바꿔보고자 노력한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으므로. 자신의 딸 앤지를 보호하면서도 일리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 최후의 결전을 치를 때만큼 강해지는 순간은 없다더니, 엘리엇은 일리나의 수술을 집도하는 내내 노련함과 담대함으로 읽는 이의 긴장에 깊은 안도와 신뢰를 안겨주기까지 한다. 결국 그는 시간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세 사람, 앤지와 일리나, 매트 모두를 지켜낸 것이다. 뒤늦게나마 진심을 다해서일까.

그의 친구 매트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알약으로 엘리엇을 살려낸다. 그는 엘리엇이 그랬던 것처럼 서른 살 엘리엇에게 나타난다. 폐암으로 죽음을 맞은 친구의 운명을 바꿔놓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약속을 지키는 게 득이 될 거라며 친구에게 금연을 당부하는 매트. 까마득한 시간 속으로 끼어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얼마나 위험한 반역이 감행되었던가. 아직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은, 정말 별 거 아닌 한마디의 당부였을 것을……. 시간이 흘러 어떤 결과로 이미 벌어져버린 후에는 그것을 되돌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되는가.

운명. 사람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주어진 길이 있을지라도, 이것을 대처하는 방식은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모여 나의 미래를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오늘을 살아야한다.

에필로그.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 인 것을」中)

나는, 그리고 여러분은, 과거와 현재, 미래,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 걸까.

엘리엇처럼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알약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우리는 최대한 현명하게, 현재를 살아내야 한다. 소중한 것을 잃고 후회해 본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최소한 이런 일을 번복하지는 말아야 한다.

과거에 매여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직 오지 않을 미래를 두려워하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놀아나지 않기를.

삶의 어떠한 순간에도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고 사랑을, 그리고 일들을 소홀히 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그것이 연인이든, 친구든, 어떤 소명이든, 먼 후일 내가 사랑한 당신이, 바로 거기에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한소진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아침독서편지 연구위원(덕신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