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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06)] 사계절의 사나이가 그렸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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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06)] 사계절의 사나이가 그렸던 유토피아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1966년 작 '사계절의 사나이'는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를 다룬다. 개봉 당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상 6개를 휩쓸었다. 지금도 평론가들 사이에서 수작(秀作)이라는 호평이 이어진다. 주연을 맡았던 존 스코필드는 토머스 모어가 환생한 듯 얼굴 주름 하나하나에 시대가 느껴진다.

영화에서 모어의 딸 마가레트는 활달한 성품에 정치적 견해가 분명한, 지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가톨릭 신앙을 지지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루터파인 애인과 당당하게 결혼하겠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에게 닥친 정치적 위험이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며, 아버지와 토론도 서슴지 않는다.

토마스 모어와 평생에 걸친 우정은 나누었던 에라스무스의 편지에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 "모어 씨만큼 자식들에게 따뜻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중략) 나는 그의 가정을 차라리 학교 또는 기독교 대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가족들 모두 집안에서 독서를 하거나 아니면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기 때문입니다."(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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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과 극 중 마가레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모어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 성공회의 탄생, 구교와 신교 간 갈등이라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미묘한 시대에 자기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영화에서처럼 모어는 시대의 광풍이 자신을 조용히 비껴가길 간절히 소망했겠지만 결국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모어의 침묵은 웅변이 되어 모든 사람을 불안하게 했으니 말이다.

침묵이 웅변이 되었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가 남긴 책이 '유토피아'다. 잘 알려진 대로 유토피아는 그리스어 '우(ou:없다)'와 '토포스(topos:장소)'를 결합한 말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없는 곳이지만 이상(理想)에서는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유토피아를 소개하는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는 그곳을 다녀왔다고 하지 않는가. 신앙심이 깊었던 모어는 어쩌면 천국을 생각하면서 유토피아를 써내려갔는지 모른다. 현실적으로 가지 못하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금과 은을 하찮게 여기는 곳이다. 그래서 흉악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묶는 사슬은 금과 은으로 만든다. 화폐도 없다. 생필품은 가게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면 된다. 식사는 공동으로 이루어지고, 집은 소유권 없이 사용권만 인정된다. 모두 다 공평하게 농사를 짓고, 지도자는 엄격한 투표를 통해 선출한다. 특정 종교가 우월하다는 주장은 불가능하다. 모든 종교는 결국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신을 섬길 뿐이라고 인식한다.

이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이다. 실제 토마스 모어는 개신교도를 과격하게 처단했다는 주장과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인 대목이 아닐까 싶다. '유토피아'를 보면 모어는 쓰나미 같이 몰려오는 시대적 파도에 꼿꼿이 맞선 강단 있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애를 보편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세계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김우영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아침독서편지 연구위원(경기 안양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