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4 15:32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를 옹호할 목적으로 쓴 공개서한의 제목에서 유명해졌다. 이 제목으로 출간된 책이 여러 권 있다. 물론 에밀 졸라의 책도 있다. 원저작자인 셈이다. 내 책장에 꽂힌 '나는 고발한다'는 2000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16년 전 김영명 교수가 쓴 책이다. '영어 사대주의 뛰어넘기'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내 기억에 세계화 논의와 함께 영어 공용어론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었을 때 출간되었다. 부제의 '뛰어넘기'가 암시하듯 저자는 영어 공용어론을 사대주의로 보고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에는 꽤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공용어를 지지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게감 있게 다가왔었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때만큼 현장감은 없다. 초점에서 벗어난 면도 있지만 지난 세월 상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의 관심이 커지면서 우리 말에 대한 인상이 달라진 부분도 크다.영어 공용어론 논쟁은 우리 시대가 맞닥뜨린 현상일 뿐 그 밑바닥에는 언어와 글자 그리고 권력이 맺는 관계를 둘러싼, 역사가 긴 논쟁이 놓여있다. 글자를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갖는다. 논쟁은 이 명제에서 출발한다. 정치학자인 김영명 교수 역시 이를 영어 공용어론 반대의 핵심 논거로 삼았다. 최근 화제인,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다룬 BBC의 기사가 흥미롭다. 작품을 영어로 옮긴 데버러 스미스는 한국어를 6년 동안 독학하고서 소설을 번역하는 수준에 올랐다. 이유는 뭔가. 한글이라는 배우기 쉽고 효율적인 문자 덕분이다. 그러니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에게도 맨부커상을 일부 줄 만하다. 기사의 골자다.누구나 쉽게 배워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한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한 이유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인 만큼 우선 의사소통의 범위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다음으로는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고 탈권위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어 공용어론 논쟁의 격렬한 공방2016.05.11 07:43
최근 뉴스에 오르내리는 대학 소식은 적어도 인문계생들에게는 우울하기만 하다. 알파고가 인공지능의 실체를 확 느끼게 하자 반대급부로 “이제 인문학이야” 하는 말들이 잠깐 스쳐가긴 했다. 물론 인간 고유의 영역이 아니겠냐는 진단이 함께했다. 그러나 폭풍을 마주한 작은 촛불 같은 희망도 취업률이라는 잣대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을 때 이미 예상된 미래가 아니었을까. 현실 세계에서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공부가 환금성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다만 인간답게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사람이라면 취업이 잘 되든 안 되든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기 마련이다. 거시적 통계상에서는 패배한 듯 보여도 개개인의 세밀한 삶을 따라가 보면 밑지는 장사가 아닌 경우도 꽤 많다. 위태한 듯 흔들리는 저 작은 촛불이 절대 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의 측면에서 그레이트 북스(고전 100권)를 커리큘럼으로 삼은 유명한 예는 미국 세인트존스 칼리지다. 국내에도 독서 운동에 관여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여러 번 회자한 대학이다. 1696년 설립되었고, 1937년에 고전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전체 학생 450명. 시험이 없다. 지원자는 자신에 관한 에세이를 제출하고 그중 80~85%가 입학을 허가받는다. 학생 중 절반 이상이 연평균 2만3500달러가 넘는 생활장학금을 받는다. 이 앞에서 취업률을 운운하기란 어렵다. 애초부터 관심도 없어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연상시키는 학습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학생도 교수도 차이가 있기 어렵다.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동료일 뿐이다. 그러나 이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하버드대를 나온 듯 몸값이 자동으로 올라가지는 않는 듯싶다. 그러니 영화에 등장하는 격렬한 토론과 낭만적 대학 생활 끝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에 단번에 오르는 해피 엔딩은 아니다. 대신 공부의 의미를 깨닫고 방향을 잘 잡도록 하여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선택해 만족한 삶을 살게2016.04.28 05:26
덕(德) 있는 인간은 누구인가. 군자, 모름지기 부도덕한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사람인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일까. 딱히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대략적인 이미지는 그런 것 같다. 몽테뉴는 수상록 제2권 11장에서 인간의 덕을 다룬다. 소제목이 ‘잔인함에 대하여’이므로 덕과는 뚜렷한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전반부에서 선과 덕을 구별하는 문제를 취급한다. 그중 흥미로운 대목을 인용해본다. 덕은 우리 내부에서 생기는 선을 향하는 성향과는 다른 것이며, 그보다 더 고귀한 것으로 생각된다. (…) 그런데 덕이란 단지 훌륭한 기질에 의해 조용히 평화롭게 이성의 길을 따라 인도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니라 위대하고 적극적인 것을 의미한다. 천성적으로 성품이 온화하고 선량하여 모욕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의 행위는 매우 훌륭하고 칭찬할 만한 행위이다. 그렇지만 모욕을 당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면서도 이성이라는 무기로써 무장하여 자기 내부의 격렬한 복수심과 싸우고 그 치열한 내적 투쟁을 겪은 후에 마침내 자기 내부의 복수심을 지배한 사람의 행위는 말할 나위도 없이 전자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전자는 선하게 행동한 것이며 후자는 덕스럽게 행동한 것이다.2016.04.13 13:31
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도시가 어떻다고 자신 있게 말할 처지는 아니다. 그곳에서 태어났어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갔다 왔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기준이기는 하다. 그럼 나는 왜 러셀 쇼토의 책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을 집어 들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자. 내가 이 도시에 대해 들어 알고 있는 바는 마약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결국 머리에 장전되어 있던 이런 의문이 쇼토의 책을 보자마자 과녁을 향해 발사된 셈이다. 처음 몇 장(章)은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암스테르담의 일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개인적인 일상사를 이미지로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곳 공기를 호흡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 소개를 다시 보았다. 저널리스트, 아 결국 암스테르담의 피상적 안내에 그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부에서부터는 어조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이 생성된 역사적 배경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주요 인물의 개인사가 유럽사를 교차하면서 깊이 있는 설명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저자 소개를 확인해보았다.2016.03.30 13:59
작년 이맘때 ‘두 국가를 함께 펴면서’라는 글에서 독서 동아리 활동계획을 소개한 적이 있다. 여기서 두 국가란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플라톤의 ‘국가’를 말한다. 두 책은 각각 아카데미아와 파이데이아라는 동아리의 2015년 독서 주제였다. 작년 한 해 모두 열심히 참여한 결과 목표대로 두 책을 모두 읽었고 포트폴리오까지 만들었다. 내면적으로는 ‘신의계약’을 기반으로 한 국가 권력이 필요하게 된 논리적 타당성을 따져보았고 철인왕이 필요하게 된 형이상학적 근거를 가늠해보았다. 외형적으로 보면 총 1600페이지를 다루었다. 올해는 독서의 연속성에 신경을 쓰면서 책을 선정했다. 우선 철학사상서를 읽는 아카데미아 동아리에서는 루소(Rousseau)를 읽기로 했다. 강력한 국가권력의 필요성을 역설한 홉스와 대비되는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여러 저작 중 ‘인간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을 선정했는데, 이유는 개인적 자유를 중시하는 정치사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학기에 걸쳐 각각 책을 읽고 중간에 홉스의 저작과 대비해 종합적으로 토론해보는 기회를 가질 예정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함께 하는 아이들은 이 책을 통해 홉스의 정치사상을 재검토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2016.03.16 17:38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독일어, 중국어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거나 접하는 이런 언어를 묶어 자연어(自然語)라 한다. 자연스럽게 발생하였고 사용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 조금씩 조정되어 간다는 성격을 부각한 이름이다. 그 반대 개념으로 인공어(人工語)가 있다. 인공어는 자연어와는 달리 처음부터 의도와 목적을 갖고 기획하여 ‘제작’하고 통용시키는 언어를 말한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쓰는 컴퓨터 언어도 인공어의 하나로 볼 수 있겠으나, 인간과 기계가 소통하기 위해 만든 것이니만큼 인공어의 전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인간과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창안한 언어만을 인공어로 분류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누가 써준다고 언어를 제작한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뜻밖에 지금껏 알려진 인공어는 수백 개에 이른다. 공식적 통계는 아니지만, “Fallen Tower: Artificial Language Page”에는 662개의 인공어 목록이 제시되어 있다. 적어도 662개 이상의 언어가 창안됐다는 사실이 자못 놀랍다. 그중 그래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만 살피면 볼라퓌크(Volapuk, 1879년), 에스페란토(Esperanto, 1887년), 이디엄 노이트랄(Idiom Neutral, 1902년), 이도(Ido, 1907년), 옥시덴탈(Occidental, 1922), 인터르링구아(Interlingua, 1951년) 등을 손꼽을 수 있다.2016.02.29 15:27
우리에게 '희망의 인문학'으로 소개된, 빈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도입한 이는 얼 쇼리스다. 그처럼 열렬한 인문학 전도사가 성장한 지적 배경에는 일명 시카고 플랜이라 불렸던 교양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 시카고 플랜을 주도한 사람은 1929년 시카고 대학에 총장에 부임했던 허친스다. 허친스는 서구의 위대한 인문 고전 100권을 완전히 익히는 데 중점을 두는 학부 대상 교양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허친스 이후 시카고 대학은 일류대학으로 발돋움했고 1929년 이후 2010년까지 시카고 대학 출신이 받은 노벨상이 81개다. 당시 허친스는 저명한 인문학 교수들을 영입하여 도서 목록 결정, 읽고 토론하는 규칙 제정, 주제별 색인 작성 등 방대한 작업을 하게 된다. 이때 그와 함께 이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모티머 제롬 애들러(Mortier J. Adler)다. 허친스와 애들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질 만한 작품을 선정하여, 저자 74명에게서 443편을 추출하였다. 그리고 1952년에는 브리태니커 사(社)를 통해 54권으로 된 전집으로 발간하기에 이른다. '서양의 위대한 책들(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은 이렇게 탄생했다.이렇게 엄청난 독서 내공을 보여준 애들러가 '독서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하고 독서 방법론을 설명한 책이 바로 '독서의 방법(How to read a book)'이다.2016.02.01 11:35
그리스 고대사의 대표 저자 투퀴디데스는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보면 그런 느낌을 짚을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기행문 같은 느낌까지 드는 이유는 중간 중간 헤로도토스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반면에 투퀴디데스의 책은 담백한 보고서 같은 느낌이 든다. 잘 정돈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투퀴디데스를 꼼꼼히 정리하며 읽다가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그것은 케르퀴라 내전(제3권 82절부터 85절)에 대한 논평이다. 케르퀴라는 당시 강대 세력인 아테네와 라케다이몬 중 어느 쪽 편에 설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벌이다 내전에 빠진다. 이어서 부자인 소수파와 민중과 노예로 구성된 다수파가 서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글 뒤에서 조용히 숨을 쉬던 투퀴디데스는 이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처음은 이렇다. “이번 내란은 그처럼 잔혹한 양상을 띠었고, 처음 발생한 내란인 만큼 충격적이었다. 나중에는 헬라스 세계 전체가 동란에 휘말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이런 내란은 헬라스의 도시들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었는데, 이런 고통은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잔혹함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고, 주어진 여건에 따라 양상이 달라져도 되풀이되고 있으며 언제나 되풀이될 것이다.2016.01.20 05:26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뜨겁다는 말은 꺼내기조차 멋쩍다. 너무 뻔해서다. 우리 집 초등학생도 그리스 신화라면 ‘근육 빵빵맨’이 등장하는 만화로 충분히 접한지라 별 스스럼없다는 표정이다. 다만 문제라면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너무 많고 가계도가 헷갈린다는 점이다. 이런 혼란 상황을 헤쳐 나가려면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가장 좋다. 만화나 영화가 아니라 기원이 될 만한 가장 확실한 책을 찾는 길이다. 검색해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작가는 단연 토마스 불핀치다. 내 기억에는 이윤기의 글이 등장하여 신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논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불핀치의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본 판으로 여겨졌다.좀 더 원전에 다가간다는 느낌으로 불핀치의 책을 원서로 뒤져본다. 영어판을 살피면 소설 읽듯 편안한 구성이 적이 마음에 든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판본보다 불핀치의 원작이 분량이 훨씬 더 많다는 판단도 선다. 우리가 읽었던 한글판 중에도 축약본이 많았구나. 하지만 불핀치의 작품도 곧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신화 이야기가 조회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본 신화집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겠지. 뻔한 결론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2015.12.21 13:08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1966년 작 '사계절의 사나이'는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를 다룬다. 개봉 당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상 6개를 휩쓸었다. 지금도 평론가들 사이에서 수작(秀作)이라는 호평이 이어진다. 주연을 맡았던 존 스코필드는 토머스 모어가 환생한 듯 얼굴 주름 하나하나에 시대가 느껴진다. 영화에서 모어의 딸 마가레트는 활달한 성품에 정치적 견해가 분명한, 지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가톨릭 신앙을 지지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루터파인 애인과 당당하게 결혼하겠다고 주장하고, 아버지에게 닥친 정치적 위험이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며, 아버지와 토론도 서슴지 않는다. 토마스 모어와 평생에 걸친 우정은 나누었던 에라스무스의 편지에 다음 구절이 등장한다. "모어 씨만큼 자식들에게 따뜻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중략) 나는 그의 가정을 차라리 학교 또는 기독교 대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가족들 모두 집안에서 독서를 하거나 아니면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기 때문입니다."(p.11)이 대목과 극 중 마가레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모어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 성공회의 탄생, 구교와 신교 간 갈등이라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미묘한 시대에 자기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2015.12.09 05:47
'손자병법'은 고대 병법서(兵法書)로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 손무(孫武)가 썼다. 백과사전을 찾아 '손자병법'을 소개하면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양권에서는 슈퍼 베스트셀러에 해당하고 인문학 권장도서 목록이라면 으레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제야 이 책을 읽고 있다.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남들이 다 본다는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고 있다가 몇 년 지나 다들 관심이 없을 때 슬쩍 보려는 심리라고나 할까. 아무튼 지금 읽고 있는 번역본은 이번에 사단법인 '올재'가 전쟁사 연구자 임용한 박사에게 의뢰하여 낸 새로운 판본이다. 서문에서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한 경위와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이번 판본이 기존 번역판 곧 남만성 판과 김광수 판을 모두 아울러 한학자가 보는 시각과 군사학자가 보는 시각을 통합하려 했다는 점이다.책에는 손자가 쓴 원문보다 번역자가 붙인 해설과 예시가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동서양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름난 전쟁 속 에피소드가 다채롭게 소개되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러니 이 책이 지닌 성격을 엄격하게 말한다면, '손자가 쓴 병법'이 아니라 '손자가 쓴 병법서를 읽는 시각'을 담고 있다 하겠다.2015.11.10 09:41
말과 행동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이렇게 물으면 십중팔구 우리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답한다. 번지르르한 말을 백날 앞세워봤자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뜻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행동에 앞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고 정확한 판단은 종합적 분석, 논리력, 지적인 검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에 대해 숙달해야 정확한 판단에 도달할 수 있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말은 행동이기도 하다. 물리적 몸짓을 기준으로 보자면 말은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을 통해 힘을 얻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하는 것을 보면, 언어는 ‘행위’가 분명하다. 이상을 생각해보면 말과 행동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행동도 잘해야 하고 말도 잘해야 한다. 그래서 시작된 기술이 수사학이다. 역사적으로 수사학은 그리스에서 시작했다.그리스의 연설문이 후대에 고전으로 남은 연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중 널리 알려진 유명한 연설문 중 하나는 페리클레스의 ‘장례식 추도연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된 뒤 아테네는 최초의 전사자를 위한 공공 장례식을 시행한다. 이때 페리클레스가 추도 연설을 하도록 선출되었다. 투키디데스의 ‘폴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실린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헬라스의 학교”라 부르며, 아테네의 민주정체를 소리높여 찬양한다.2015.10.28 16:58
실정법상 불법인 적은 없었지만, 사실 만화가 정서법(情緖法)상 합법적 독서 대상이 된 지는 별로 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만화책이나 붙잡고’ 있는 아이를 보며 행복할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와 비교하면 만화도 교육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퍼지긴 했다. 열렬한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극적 용인은 고려해볼 만하게 되었다는 말이다.편견이라 비난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선이 너무 미끈한 만화, 원색을 지나치게 많이 쓴 만화, 인물의 표정이 과장된 만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자극적이라 판단해서다. 그러다 보니 소재나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화풍이 이와 같으면 눈길을 주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기본적으로 만화를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내 나름 지지하는 만화가 있다. 바로 땡땡 시리즈다. 벨기에 만화가 에르제(Herge)(1907-1983)가 평생 그린 만화다. 소년 기자 땡땡(Tintin)이 애완견 밀루(Milou)와 함께 전 세계를 다니며 재치와 용기로 온갖 사건을 해결한다. 사실 땡땡 시리즈는 유럽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고전 작품’이다. 예컨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선거 승리 연설에서 “땡땡은 세상에서 내 유일한 라이벌이다.2015.10.15 08:36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던 당시 체코 프라하에서 60㎞ 떨어진 곳에 테레진 또는 테레지엔슈타트라 불리는 게토(유대인 거주 지역)가 있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도 그곳을 거쳤다.홀로코스트 당시 외부에는 이곳이 매우 행복하고 안락한 게토로 보였다. 나치는 테레진을 무대로 홍보 영화를 찍었고, 심지어 적십자사를 초청하여 내부 시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적십자사는 그곳에서 멋진 카페와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며 감명을 받는다. 아울러 가짜 은행, 유치원, 상점을 만들었고,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잘 지낸다고 말하도록 훈련했다. 덕분에 테레진이 일종의 휴양소 같은 곳이라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적십자 대표단이 떠나자마자 공연을 했던 아이들은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다. 다른 유대인들도 배고픔과 고통 속에서 죽거나,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죽었다. 테레진에 대한 기록을 읽다 보면 인간의 잔인함, 권력의 폐해, 도덕적 무능력감, 일상이 갖는 역사적 무게감 같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풀리지 않는 이런 딜레마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반복됐기에 거론하는 것조차 덤덤해진다. 하지만 테레진에는 교육의 본질을 놓고 따져볼 대목이 있다.2015.09.30 08:13
사실 내가 영국사에 관해 관심을 두어야 할 필연적 이유나 동기는 없다. 그러다 보니 영국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책을 구태여 찾아 읽을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요즘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을 읽고 있는 이유는 '영국사'가 아니라 '찰스 디킨스'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초반에 배경처럼 지나가는 강아지도 나중에는 이야기 전개에서 결정적 한 부분으로 짜여 들어가는 솜씨는 디킨스 소설의 특징을 이룬다. 그래서 나는 디킨스의 소설을 좋아한다.이 글을 쓰기 전까지 읽은 대목은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이야기다. 아버지 헨리 2세에게 불효막심하던 리처드는 빨리 왕이 되고 싶은 마음에 수차례 반란과 화해를 거듭한 참이다. 디킨스는 "앞에서 봤듯이 리처드는 오랜 시절부터 아버지를 배신했지만, 막상 입장이 바뀌어 왕이 되고 보니 배반이란 것이 얼마나 몹쓸 짓인지 알게 되었다."라고 리처드의 마음을 그렸다. 그 앞까지 내게 흥미를 끈 대목은 켈트 족의 생활상, 색슨 족의 진출과 데인 족의 침략, 드루이드교의 유래,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에 진출하게 된 경위였다. 특히 색슨족의 진출 부분은 오늘날 앵글로색슨 족으로 일컫는 영국인의 기원을 다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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