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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88)] 봄은 낮은 데서부터…서정홍의 부끄럽지 않은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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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688)] 봄은 낮은 데서부터…서정홍의 부끄럽지 않은 밥상

오는 7월에 열리게 될 전국독서새물결 주최 ‘대한민국 독서토론‧논술대회’의 전체 주제가 ‘밥’이라서 그런지 요즘은 서점에 가면 밥과 관련된 책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서정홍 시인의 ‘부끄럽지 않은 밥상’도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책인데 처음 몇 쪽을 읽어보다가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 끝까지 읽고 싶은 욕심에 모셔온(?) 책입니다. 마치 작가 서정홍 시인이 곁에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듯한 말투가 글 속에 배어 있어 책을 모셔왔다는 표현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서정홍 시인은 도시의 치열한 경쟁구도에서 각박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산골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도시에서 돈 몇 푼으로 먹거리를 사서 아무 생각도 없이 목숨을 이어온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며 ‘밥상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밥만 먹고 살아온 것’ 자체가 자연과 사람한테 죄가 되는 줄 미처 몰랐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단순한 삶을 통해 내 영혼조차 맑아지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하는 시인을 보면서 아직 6년차 농부라 어설프지만 경작의 즐거움을 아는 진정한 농사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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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한참 넘기다 보니 ‘봄은 낮은 데서부터’라는 소제목이 보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봄은 낮은 데서 옵니다’라는 시가 생각나 가만히 마음에 떠올려 봅니다. 봄은 산발치에서, 밭둑에서, 개울가에서, 담장 밑에서 꿈틀거리며 온답니다. 혹은 변두리에서, 들판 끝에서, 구석진 곳에서,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먼저 온답니다. 봄바람은 그런 먼 곳, 낮은 곳, 구석지고 응달진 곳에 사는 풀과 나무들을 푸르게 바꾸어 놓은 다음에 도시 한복판으로 와서 가로수 껍질을 깨운답니다.

서정홍 시인이 도시의 삶을 뒤로 하고 자연 속에 묻혀 지내는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낮은 데서부터 오는 봄이 되고 싶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 농업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고되고 힘들겠지만 더불어 흙을 만지며 땀과 눈물로 거두면서 함께 일하는 농부들의 희망이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 그는 스스로 천해지고자, 스스로 낮아지고자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천한 것으로 인해 귀해지는 것이고, 낮은 것으로 인해 높아지는 것이니 천하고 낮은 것은 없어서는 안 될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요.
봄은 분명 낮은 데서부터 옵니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여린 새싹들은 봄바람에 흙냄새를 실어 멀리 도시로 보냅니다. 언 땅을 녹이며 흘러내리는 개울물 소리에 봄이 묻어 있습니다. 따스한 양지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민들레와 제비꽃이 고개를 조금씩 내밀고 있습니다. 흙을 일구고 거름을 내느라 바쁜 농부들의 손끝에도 봄이 담겨 있습니다. 땅은 생명이라는 믿음은 간 곳 없고 부채는 늘어가지만 가난하고 늙은 농부들의 손놀림은 봄의 재촉으로 오늘도 분주하기만 합니다. 봄은 이렇게 낮은 데서부터 오는데 우리는 그걸 모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예경순 (사)전국독서새물결모임 진로독서연구소장(서울교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