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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715)]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무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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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한 독서편지(715)]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무진기행

하루를 자고나면, 하루만큼 푸르러지는 5월. 내 고장 강화도(江華島)는 온통 신록(新綠)으로 물들어있다. 물결치는 싱그러움을 그득그득 담아놓은 풍경이 황홀하리만치 아름답다. 싱그러운 대형 브로컬리같은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 초고추장처럼 기대어 앉아, 흠뻑 녹음(綠陰)에 취해 보았으면 좋겠다.

아아, 찬란한 이 계절을 마음껏 즐길 수만은 없는 아픔의 청춘(靑春)들이여! 떠나자. 어느 노래 가사처럼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자. 그런데 떠나면, 그리고 비우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무엇으로 다시 채워져 살아갈까?

긴장감이 다소 풀어진 요즘, 오히려 바빴던 나날들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내 몸과 마음이 돌보아달라고 아우성이다. 많이 지쳐있으니 조금 다독여달라고.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봄의 흥취를 자전거에 실어 꽃길을 달려본다. 살아 숨쉬는 물결 위에 고요히 정박해있는 작은 배, 이름 모를 갖가지 꽃과 나무들, 가냘픈 유채꽃과 탐스러운 철쭉꽃 다발이, 달빛 아래 한 데 어우러져 마음을 몰랑거리게 한다. 바람에 부대끼는 아름드리 나무들의 살랑거림은 솨-아 숫제 소나기가 내리는 대숲을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정지(停止).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과 같다는 표현이 정말이지 마음에 와 닿는 순간이다. 가지고 나왔던 답답한 마음들을 오솔한 이 길에 던져두고 냅다 달려야지. 한 시간 남짓한 자전거 여행으로 나를 만나고 돌아왔으니 나름 꽤 값진 시간이었다. 여행. 고향. 서울. 그리고 일과 사람. 난마처럼 엉킨 생각들 덕분에 세 번째 조우하게 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 오늘 나는 당신과 함께 ‘무진’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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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윤희중’을 따라 세 번째 따라나선 무진행. 역시나 이번에도 헤매고 있다. 뿌연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느낌이다. 무진에 오기만 하면 그가 하는 생각이란, 늘 이렇듯 엉뚱하고 뒤죽박죽인 것뿐이라더니 정말이다.
아주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확하게 보이는 것도 아닌 ‘안개’의 불확실함이 무진의 명물이다. 멍하니 끼어있는 답답함과 서투름. 그 안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정체는 내 시야 안에 선 나뿐이다. 그런 점에서 윤희중이 새 출발이 필요할 때나, 실패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무진으로 내려오는 것은 아마도 관념 속에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은밀하게 들춰보고 싶을 때 행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에게 무진은 어둡던 청년 시절을 연상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그는 쓸쓸하고 방황했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끊임없이 진짜 자기의 모습을 갈구했다. 과거의 자신을 빼어 닮은 하인숙과 자살한 술집여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서울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표상하는 조의 속물적인 모습을 비꼬아 보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 이를테면 자욱한 안개가 표표한 이른 아침이나 이슥한 밤에 나 느껴봄직한 아스라한 감각들이, 구석구석에 서려있어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있으나, 묘하게 그 고소하고 습한 안개 냄새에 야릇한 말초적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간적인 만족일 뿐, 무진도 그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거나 쉼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사실, 그에게 무진은 6.25 사변의 징병을 피해 골방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곳이고, 승진을 꾸며놓기 위한 처와 장인의 호걸스런 웃음을 피해 온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때나 지금이나 골방보다는 전선을, 장인어른의 호걸스러운 웃음보다는 차라리 묘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양심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젊은 날과 꼭 닮은 하인숙을 사랑했지만, 아내의 ‘전보’와 오랫동안 다투다가, 결국은, 진짜 마음이 담겨있는 ‘편지’를 찢어버리고는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존경하는 박의 순정을, 연민을 느낀 여인 하인숙을 배반하고 돌아선 그를 비겁하다 느끼면서도 마냥 비난할 수 없는 것은 나뿐일까.

어쩌면,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찾는 일보다 미끈하게 일을 처리하며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게 될 때, 오히려 안심을 하게 되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선로를 이탈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 결국은 일상의 궤도를 달려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게 우리네 모습 아닌가 말이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에서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오히려 허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윤희중처럼 말이다. 거짓된 페르소나가 주는 편안함을 택한 그. 돌아갈 서울에선 비록 그 자신의 진실한 모습은 감추어질지언정 찬란한 햇볕 속에 누리게 될 안정된 일상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선택을 천박하다, 속물이다 할 수 있을까?
열등감과 속물적 욕망.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서투르게 바쁘면서조차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조의 모습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한다. 진짜 바빠서 자랑스러워 할 틈도 없는 세상의 많은 ‘윤희중들’에게 느끼는 열등감.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편지’가 아닌 ‘전보’를 택하고,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무진’을 떠나 ‘서울’로 돌아간 그였지만, 다행히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고향 ‘무진’을 통해 진짜 자신을 마주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돌아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누구도 ‘현실’을, ‘물질’을 부정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현실’에 속박되어 우리가 만들어 놓은 도시의 산물과 자본의 굴레를 떠받들며 우울하게 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설사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지라도, 때때로 순수를 회복하고, 부끄러운 내 모습을 돌아보는 용기를 가지고 사는 것. 가끔은 그렇게 여행하듯 살아보자.

지금쯤 그의 서울 생활은 어떠한지 자못 궁금해진다.
한소진 덕신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