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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여유] 무한 ‘딸깍’ 속에서 빛나는 ‘수고’ ‘시대예보: 수고인류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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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여유] 무한 ‘딸깍’ 속에서 빛나는 ‘수고’ ‘시대예보: 수고인류의 시간’

시대예보: 수고인류의 시간/ 송길영/ 교보문고이미지 확대보기
시대예보: 수고인류의 시간/ 송길영/ 교보문고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640㎞가 넘는 필름이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만 1200만 관객을 동원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 이야기다. 제작진은 영화 전체를 IMAX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필름을 사용했다. IMAX 필름 하나로 한 번에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분 30초에서 3분 남짓. 그 짧은 시간 안에 배우의 연기와 카메라의 움직임, 수많은 스태프의 호흡이 맞아야 했다. 실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실물 크기의 외눈박이 거인 모형을 제작해 현실감을 극대화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고 컴퓨터 그래픽스(CG)·영상편집 기술을 활용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하게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는 시대에 놀런 감독은 왜 이토록 손이 많이 가는 고전적인 방식을 택했을까? 적은 노력으로 그럴듯한 결과물을 얻는 것보다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작품을 빚어내기를 바랐기 때문 아니었을까? 개봉 후 오랫동안 IMAX 관람석 매진이 이어지며 관객도 거장 감독의 기념비적인 작품에 경의를 표했다.

‘딸깍’이 성행할수록 ‘수고로움’의 가치가 빛난다. 인간의 삶 곳곳에 인공지능(AI)이 깊이 침투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회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변곡점과 함의를 짚어내는 마인드마이너(mind miner) 송길영은 이를 두고 ‘수고인류’의 출현을 예고했다.

올해로 4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시대예보’ 시리즈의 신작이 나왔다. 2023년 첫 책 ‘핵개인의 시대’에서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서는 개인을 포착했고, 2024년 ‘호명사회’에서는 직함 대신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사회를 예보했다. 지난해 ‘경량문명의 탄생’에서는 AI와 손잡은 소수가 거대 조직을 앞지르는 가벼운 문명의 태동을 이야기했다. 이 모든 변화의 끝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이 바로 이번 책에 담겨 있다.
저자가 내놓은 답은 ‘수고’다. 클릭 한 번이면 보고서가 나오고 영상이 만들어지는, 이른바 ‘딸깍’의 시대에서는 복제가 쉬워질수록 원본의 가치가 올라간다. 1분 만에 쇼츠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것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물도 비슷비슷해지고, 그 양이 많아질수록 가치는 0에 수렴한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충분히 복제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본인간’과 자신만의 판단과 숙련을 쌓고 그 결과물에 자기 이름을 거는 ‘원본인간’이다. 원본인간이 되고자 필요한 시간과 시행착오,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을 ‘수고인류’라 부른다. 여기서 수고는 단순히 고생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니다. 불필요한 반복 업무와 형식적 절차는 과감히 기술에 넘기되, 스스로 의미 있다고 판단한 일에는 시간을 들이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를 말한다. 저자는 시간을 건너뛸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 역설적으로 수고인류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변화는 조직의 풍경도 바꿀 것이라고 책은 예보한다. 학벌이나 입사 후 교육에 기대어 대규모로 사람을 뽑던 ‘채용’의 시대에서, 무엇을 할 줄 아는지를 먼저 묻고 이미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모셔오는 ‘영입’의 시대로 옮겨간다. 보고와 결재로 돌아가던 위계는 약해지고, 각자가 직접 정보를 찾아 판단하는 조직이 강해진다. 아직도 고객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내 부장님을 상대하며 내부 보고와 형식절차에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면 도태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 밖에도 책은 ‘빈번한 시작’, ‘수고조직’ 등의 키워드로 AI 이후의 인간과 조직을 풀어낸다.

물론 그늘도 있다. 신입 채용이 줄면 경험과 숙련을 쌓을 통로 자체가 좁아지지 않을까? 원본인간으로 성장할 기회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우려를 인정하며 아직 정확한 답은 없다고 솔직히 말한다. 다만 경험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넓히는 사회적 노력, 기존 조직이 맡아온 훈련 기능을 대신할 새로운 도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한편으로는 나이에 맞춰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적령기’의 강박이 풀리고, 언제든 새로 시작할 기회가 열린다는 희망도 함께 전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수고를 쌓아가는 일일 것이다. 놀런 감독의 성취와 같은 반열에 우리 모두가 설 수는 없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나만이 증명할 수 있는 수고를 부단히 연마해 나간다면 적어도 AI에 쉽사리 대체되지 않는 고유의 존재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양준영 교보문고 eBook사업팀 차장



조용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ccho@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