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스트 이교관, 동서양 외교사상가 전략 분석 통해 '제한적 승리'의 불가피성 역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그리고 최근에 발생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신냉전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서방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과 이에 맞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3극 시대가 열릴지, 아니면 패권 충돌의 시대가 끝나고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열릴지 초미의 관심사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싱크 탱커인 한국국가대전략연구원 이교관 원장(전 통일부 정책보좌관)이 펴낸 『패권 충돌의 시대 한국의 대전략』 (김앤김북스)은 중견 국가인 한국이 글로벌 강국 도약을 위해 필요한 대전략을 꼼꼼하게 다룬 전략사상서다. 특히 탈냉전 질서의 종언에 따른 도전들을 극복하기 위한 한국의 정치‧경제‧외교안보 전략을 다룬 『전략국가의 탄생』에 이은 후속편으로, 한국에서도 대전략가의 탄생을 예고하는 묵직한 저술이다.
20세기 최고의 전략가로 꼽히는 브레진스키, 키신저, 스티븐 월튼 등이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대전략을 제시했다면 이교관 원장은 남북한이 대치해 있고,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의 틈바구니에 끼인 한국이 살아남는 생존 전략을 넘어 세계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대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제20대 대통령은 물론 기업가들도 격랑이 몰아치고 있는 국제질서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한국의 대전략 제안에 앞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탈냉전 질서가 붕괴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미국의 대전략은 왜 자유주의 패권에서 역외 균형이라는 제한적 개입주의로 전환하고 있는가? 중국이 역내 패권을 추구하는 이유와 전략은 무엇인가? 중국이 군사력을 앞세워 서해를 내해화하고, 북한 붕괴시 무력 개입을 시도할 경우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군 철수 이후를 준비하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제2 대동아공영권 야망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북한 비핵화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고 비핵화 협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따르면 냉전 승리 이후 미국은 미국의 이상주의 외교안보 전문가 그룹인 '블롭(Blob)'의 주도로 클린턴, 부시,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글로벌 확산을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 패권' 전략을 추진해왔다. 중동과 동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도 체제 전환을 모색했다.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고 나토 가입이 추진되자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병합을 통해 반격에 나섰다. 체제 전환의 위협을 느낀 중국 역시 남중국해에 군사거점을 확보하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는 등 미국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 책은 미국 주도의 탈냉전 질서가 종언을 고하게 만든 원인을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추구한 데서 찾는다. "냉전의 승자는 승리의 기쁨에 젖어 어리석어진 나머지 오만해졌고 패자가 재기할 수 없는 수준까지 무력화하는 완전한 승리를 추구했다. 하지만 코너에 몰린 패자의 반격으로 인해 승자의 전리품이었던 탈냉전 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크세노폰, 투키디데스, 맹자, 마키아벨리, 클라우제비츠, 케넌, 키신저 등 고대, 근대, 현대의 전략 사상가들이 남긴 위대한 고전들에서 현재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러한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 핵심적인 명제를 도출해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완전한 승리의 비극과 제한적 승리의 불가피성'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맺는 데 활용하지 않고 로마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려 과욕을 부린 것이 카르타고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보았다. 또 프러시아의 군사 전략가였던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소 봉쇄 정책의 기획자였던 조지 F. 케넌은 "전면적인 승리라는 개념은 과거에도 가장 큰 손해를 끼쳤고 미래에도 가장 큰 손해를 야기할 위험한 망상이다"고 말했다. 케넌은 미국이 동유럽의 끝인 우크라이나까지 나토를 확대함으로써 러시아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추구할 경우 러시아의 반발에 따른 재앙을 경고한 바 있다. 문제는 그러한 재앙이 단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귀속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탈냉전의 환상에 도취돼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궤도에서 이탈하도록 허용해왔다"고 지적한 바 있는 헨리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의 완전한 승리주의가 두 나라를 무력충돌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저자는 "현재의 글로벌 위기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하기보다는 두 나라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추구하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어떻게든 무릎 꿇게 만들겠다는 완전한 승리 전략 대신 그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걸맞은 지위를 인정하고 세계 안정에 책임 있는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미국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을 지원하고 나토 가입을 지지하는가 하면 IMF와 세계은행(IBRD)에 대한 중국의 지분 확대를 반대했다. 미국의 궤도에 두 나라를 잡아두기보다는 오히려 이탈하도록 부추겼다고 저자는 꼬집었다.
물론 제한적 승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상대 국가가 도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러시아가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려 하거나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등 세계질서를 위협할 경우에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확전 우위(escalation dominance)' 전략을 통해 러시아나 중국의 위험한 행동을 저지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즉 전쟁을 불사하는 각오로 단호히 대처할 수 있어야 그 같은 위협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1년 8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 철수함으로써 20여 년간 지속된 대 테러 전쟁의 막이 내렸다. 중동의 정치체제를 바꾸려는 미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다른 나라의 정치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려 했던 자유주의 패권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게 되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자유주의 패권 정책의 폐기를 선언한 바 있으며 더 이상 세계의 경찰 노릇을 않겠노라 밝혔다. 미국의 핵심 이익이 없는 지역에 대한 미국의 관여는 축소되고 있으며, 핵심 이익이 걸려 있더라도 직접적이고 상시적인 군사 개입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이 전통적인 대외 전략인 역외 균형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서 드러났듯이. 이제 미국은 글로벌 안보를 모두 책임질 수 있는 경제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갈수록 국내 문제 해결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도록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미국은 중동에 이어, 유럽과 동아시아에서도 군사적 관여를 축소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점점 더 지역 동맹국에게 안보 책임을 위임하는 형태로 세계질서를 관리하려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이 역외 균형 전략에 따라 동아시아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거나 규모를 축소할 경우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이고 역내 자유주의 질서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은 미국의 빈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역내 질서를 재구축하려 할 것이다. 저자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미국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며, 중국이나 일본의 패권적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역내 질서 전반을 관리하는 플랫폼으로서 한미 전략핵동맹을 제안한다. 한국과 미국이 전술 핵무기를 전략적으로 공유하는 전략핵동맹을 통해 중국의 패권 추구와 일본의 군국주의화 그리고 북한의 핵위협을 함께 억지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은 한국 사법부의 일제시대 징용공 판결을 빌미로 2019년 반도체 핵심소재의 대 한국 수출금지 조치를 단행해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가하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으로 하여금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을 거부하도록 덫을 놓았다. 하지만 한미 관계를 벌려 놓으려는 일본의 책략은 한국이 지소미아를 연장함으로써 성공하지 못했다.
저자는 일본이 제2의 대동아공영권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군국주의적 본성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17세기 이후 일본 정치를 도요토미 계열과 도쿠가와 계열들 간의 대립의 역사로 바라본다. 아베를 비롯한 현재의 집권 세력은 도요토미 계열로서 명치유신을 주도했고 쇼와 시대를 주름잡았던 군국주의 세력의 후예들이다. 이들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미국에 제안하는 등 일본 중심의 대중 견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전쟁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도 이들이다. 2013년 미국이 시리아 사태에 대한 지상군 투입을 주저하는 것을 본 일본은 미국이 머지 않아 역내에서 철수할 것으로 내다보고 군사 대국화의 길을 모색해오고 있다.
저자는 "일본의 전략은 반중 네트워크에서 한국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한국을 중국 진영으로 밀어냄으로써 미국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려 한다"고 분석한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이 떠난 이후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지, 누가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을 쥘지를 놓고 경쟁하게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차세대 역내 패권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면 미국 신뢰의 향방에 따라 승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저자는 내다본다. 미국이 더 신뢰하는 쪽이 이긴다는 것이다. 결국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일본 군국주의의 발호를 억지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저자는 결론을 내린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