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2020년 6월,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때, 한국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근대전망이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와의 공생이 주장되던 2021년 9월이 되면 성찰적 시민에 기반한 제2근대 전망이 단연 돋보였다. 세계적 관점에서 한국사회의는 이처럼 양쪽 방향이 다 강력하다.
근대는 서구 뒤를 추격하는 발전경로지만 제2근대는 서구를 앞지를 수 있는 길이다. 민주주의와도 호환성이 높다. 문제는 제2근대 발전의 잠재력이 한국에 풍부하지만 구조적 장애요인이 또한 심각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성찰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위험사회의 가공할 현실
이 글의 출발점은 우리가 지구적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증후들은 차고 넘친다. 기후변화의 재앙들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경고는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다. 수년간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19와의 싸움은 더 무서운 팬데믹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가공할 파괴력을 갖는 핵 폭탄의 위험과 함께 원자력 발전에 따른 방사능 노출 사고의 위험이 인류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고삐 풀린 자본주의적 경쟁의 세계화 논리가 갈수록 빈부격차를 현저히 심화시킨다. 위험에 내몰린 개인들이 고립된 채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면서 계층간의 단절,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 폭력, 자살, 우울증, 정신질환 등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앞만 보고 돌진적 근대화의 길을 달려온 한국에서는, 그 필연적인 부작용으로서, 가공할 산업재해와 함께 대규모의 화재 및 교통사고, 건축붕괴, 화공품에 의한 공기 및 수질 오염, 환경파괴에 따른 건강위험이 심각하다.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빨리 진행된 개인화 과정에서 가치관이 크게 변형되어 가족공동체의 기능상실,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 세대간 대화단절, 성폭력, 성희롱 같은 부작용이 현저해지고 있다. 2022년 10월 말, 서울 이태원의 대규모 압사 참사는 위험사회의 심연이 얼마나 깊숙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험적 연구의 필요성
세계의 구조변동에 관한 이론적 사유의 스케일이 아무리 거대하고 깊다 하더라도 시민의 관점에서 경험적인 연구를 하려면 어떤 설문으로 시민의 반응을 측정할 것인가의 과제에 부딪친다. 여기에서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려야 경험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두 개의 축에 주목한다.
1) 예견된 미래: 미래의 삶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불안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보는가? 예측가능성은 과학의 기능이자 근대의 패러다임인 반면, 예측불가능성은 증가하는 삶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제2근대의 패러다임을 뜻한다.
2) 신뢰의 대상: 과학기술의 진단과 처방을 신뢰하는가, 아니면 삶의 불확실성을 성찰하는 시민능력을 신뢰하는가? 전자는 근대의 패러다임이고 후자는 제2근대의 패러다임에 속한다.
이렇게 두 축을 교차하여 얻은 4가지 미래전망은 1) 과학기술 기반의 전형적인 근대전망, 2) 성찰적 시민기반의 제2 근대 전망, 3) 기술관료적 제2근대 전망, 4)포스트-과학시대의 근대전망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대칭적인 것으로서 가장 중요하다.
경험적 자료로는 중민재단이 2020년 6월과 2021년 9월에 실시했던 세계 30개 대도시 온라인 시민의식조사 자료를 이용했다. 우선 2021년 9월의 자료로 세계적 분포를 보면, 첫 번째의 근대의 전망을 갖춘 시민은 31.1%, 두 번째의 제2근대 전망을 갖춘 시민은 36.0%로 나왔다.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2020년 6월의 조사에서는 과학과 기술을 신뢰하는 전형적인 근대전망은 세계평균 26.6%였지만 서울은 35.3%였다. 이것은 도쿄 22.2%, 오사카 21.9%, 싱가포르 23.3%, 뉴욕 27.6%, 런던 25.3%. 파리 22.5%. 베를린 23.7%. 로마 22.0% 보다 현저히 높다.
그러나 코로나-19와의 공존이 주장되던 2021년 9월이 되면 상당한 변화가 관찰된다. 무엇보다 성찰적 시민에 기반한 제2근대 전망은 두 시기에 걸쳐 세계평균은 36.0% 수준을 유지하는 데 반해,, 서울은 2020년 6월 32,2%에서 2021년 9월에는 42.4%로 현저히 늘었다.
한국의 두 가지 발전 추세
이런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의 두 가지 추세에 주목하고 싶다. 하나는 코로나-19 시대에 정착된 의료전문가 위주의 근대전망이 계속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전문가의 정보해석이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2년 2월 23일 한국을 바이오 인력양성 허브로 선정했으며 8월 26일 SK 바이오사이언스가 주도한 ‘스카이코비원’으로 불리는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늦었지만 고무적인 일이다. 바이오 산업 선도국이 되겠다는 정부의 정책의지도 강하다.
다른 하나는 성찰적 시민의 성장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중심의 상명하복의 방역 체계 대신에 시민이 적극 참여하는 사회협치의 필요성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잠재력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회귀분석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자냐 여자냐, 젊은이냐 노인이냐, 학력이 높으냐 낮으냐 같은 기존 인구학적 변수는 성찰적 제2근대라는 대전환의 주요 변수가 아니다.
2) 종래의 진보보다는 보수적 이념성향의 시민이 성찰적 제2근대의 대전환을 이끌 잠재력을 갖는다.
3) 주관적 계층소속이 높은 시민, 정치를 투쟁이 아닌 화합으로 보는 시민이 대전환을 이끈다.
4) 개인화 지수가 높은 시민, 삶의 불안지수가 높은 시민. 긴급 행정명령 등에 의한 통치대신 법치를 선호하고 시민자유를 중시하는 시민이 대전환의 주역이 된다.
근대와 제2근대의 미래 전망이 시민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사뭇 다르다. 과학과 기술을 신봉하는 근대적 시민은 정부주도 방역정책을 따르는 데 충실한 반면, 성찰적 시민은 위험예방을 위해 시민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재난극복의 열쇠가 정부역할에 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시민의 적극적 신뢰가 중요하다고 본다. 전자는 경제회복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 정책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그 반대다. 제2근대 성찰적 시민은 긴급명령 같은 행정적 자유재량권에 의존하는 통치 방식대신 시민의 자유신장과 참여를 적극 요구한다. 이것은 세계적 현상이지만 한국에서 특히 강하다. 또한 이들은 문명의 축이 동아시아로 이동한다는 견해에 적극 찬성하는 경향이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한 장점이자 특징은 성찰적 시민이 성장하면서 제2근대 진입을 향한 진통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전환의 사회적 잠재력은 풍부하지만 아직 현실화되지 못한 채 사회구조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정치력의 빈곤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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