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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근대무용가' 배구자의 예기(藝技)를 존중한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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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근대무용가' 배구자의 예기(藝技)를 존중한 춤

[나의 신작연대기(18)] 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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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늘 자신이 대나무 씨앗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언제 발아될지 모르는 시간/ 흐르는 강물에 마음을 던져두고/ 세월이 무심하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바람이 셀 때 풀이 되었다가/ 화평의 시절에 건강한 대나무가 되었다/ 저고리 동정을 대나무 키처럼 빳빳하게 세우고/ 치마선이 부드러운 바람을 타면/ 무대는 늘 놀이터가 되고/ 삶의 터전이 되었다/ 푸르게 자신이 빛으로 커왔다/ 느린 걸음으로 차례를 느끼던 시절을 지나/ 시대를 낚은 선각자들의 삶을 헤아리며/ 조용히 그 시절 타령춤에 자신을 실어 본다/ 천안삼거리 흥

8월 25일(금) 저녁 국수호의 ‘한여름 밤의 춤’은 내공의 한국춤 연기자이자 국수호디딤무용단 상임 안무자인 노해진을 조련시켜 유서 깊은 정동극장 무대에 출연시켰다. 노련한 노해진의 스승 국수호는 한국 최초의 근대무용가이자 선구자인 배구자(裵龜子)의 춤을 예전부터 만들 야심이 있었다. 노해진은 배구자로 설정되었고, 정동극장 초청 기획공연에서 국수호 안무의 신작 '배구자의 타령춤' 제작 과정에 참여한다. 안무가가 있지만, 춤꾼 노해진은 움직임과 심리 연기 면에서 안무가 너머의 기량을 선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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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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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노해진(중앙대 무용과·교육대학원 졸, 단국대 무용학 박사)은 춤 자체보다 춤 이면의 무용사를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미진을 실감한다. 한국춤의 선구자로서 서양 문물이 전무했을 당시에 가장 앞선 예술계의 리더, 격조와 품격의 문화 감성에 앞서 나간 선각자로서 배구자가 추구했던 세계에 노해진 또한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고, 배구자가 흘린 불순 부분을 제거하면서 당대의 시대 상황을 헤아리고 상상하면서 가장 화려하고 멋진 예술세계를 전개했던 분을 표현한다는 점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국수호 안무의 신작 무대…당시 가사·육성 흥미로워


배구자(1907~2003)는 경남 양산에서 출생하여 미국 산타 바바라에서 타계한 무용가이다. 일본 덴카스(天勝) 마술단에 입단(1915~1925)해 기예를 익혔고, 1928년 4월 음악무용회를 열었고, 1929년 7월에 서울 중구 신당동에 한국 최초의 무용연구소인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열고, 그해 9월에 제1회 공연을 했다. 악극단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녀의 춤은 전통적 미감을 대중적인 가무극 형식으로 재현했다. 개명한 배구자예술연구소 제1회 공연(1931년 1월)은 '양산도' '오동나무' '도라지타령' 등 민요를 무대화한 가무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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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은 자신의 감정 전달보다 배구자의 감성을 녹여내려고 집중했다. 미국 여행도 힘든 시기에 미국에 가서 서양 발레를 배우고, 공연하는 무용계의 대선배는 이념과 행실을 떠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배구자 춤의 대리자가 되어 무대에 서게 되었다. 배구자의 춤은 동생 배한라와 하와이의 한국무용학원에 전수되었다. 노해진은 여고 시절 광주의 엄영자로부터 발레를 전공 과정으로 3년 동안 배운 적이 있고, 안무가 국수호가 이번 안무에 발레식 기교를 강조하는 동작과 한국적 호흡 구성에 중점을 두어 만감이 교차했다.

음악 사용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배구자악극단 문예부 작사, 포리도루(POLYDOR) 관현악단 반주, 배구자 노래의 ‘천안삼거리’로부터 시작되어 뒤이어 이재하 작곡의 ‘타령’, ‘엇모리장단’, ‘휘모리장단’으로 구성되었다. 녹음 방식이 다른 당시의 가사와 육성은 현재에 이르러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 작품에 주목하게 만든다. 노해진은 단국대 무용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그녀는 이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실기과 겸임교수, 강원대 강사 시절에도 늘 강의 시간에 춤은 전통 음악의 장단에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노해진 자신 감정 전달보다 선각자의 감성 녹이려 집중


의상 부분의 재현은 흑백 사진 속에 나오는 배구자의 의상을 추측하여 만들어졌다. 당대 최고급 소재에 화려하며 개성 있는 의상으로 설정되었고, 사진 속에서도 정통 한국춤의 절제된 부분은 있었지만,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노해진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의상 제작은 쎄뚜 진영진이 맡아 절제되면서도 열정적 분위기를 창출했다. 한복 의상은 전통 격식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제작되었고, 색 조합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질감과 색감 부분에서 신경 쓰며 제작되었다. 한삼도 겉감 의상 같은 재질로 표현되었다. 작품의 숨은 뜻을 알기 위해 배구자 사연에 대한 상식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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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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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의 대중화를 지향한 배구자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지속적으로 현실과 타협한 무용가, 종합예술을 지향하는 악극단 경력을 바탕으로 상업적 가무 양식에 치중한 흥행업자였지만 광복 후 일본으로 도피하듯 넘어갔고, 하와이를 거쳐 산타 바바라까지 이주했다. 노해진은 당대의 최고 무용수를 표현하는 데 부담감이 있었지만, 영광이었고, 작품이 만들어지고 나서 보람도 되고 춤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어 자유로웠다. 일제강점기에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배구자로부터 조선인들은 큰 위안을 받았다.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 배구자는 무용수이자 창의적 예술가였다. 그녀는 전통춤의 무대화와 발레 등 서양 무용의 수용을 위해 노력했고, 가극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공연을 했으며, 전통춤의 무대화를 꾀했다. 배구자는 '배구자 무용연구소' '배구자예술연구소'를 운영했고, '배구자 악극단'은 한국을 비롯해 만주·일본 등지에서 자주 순회공연을 가졌다. 흥행에는 배구자, 예술성에는 조택원·최승희로 평가되던 시절의 최고 흥행의 마법사였다.

흑백 사진 속 의상 재현…절제·열정적 분위기 창출


배구자는 민요에 맞춘 춤을 만들려 했고, 검무나 승무를 새롭게 만들고자 했다. 배구자를 진지한 무용 교육자나 무용가로 결부시키는 것보다는 무용단 단장 혹은 대중 흥행사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배구자악극단은 다양한 악극단들과 공연단체들의 원류로서 시대를 풍미했다. 광복 후 미군정 시절의 배구자는 좋지 않은 풍문의 사업에 손을 대었고 결국 일본계 미군을 따라 도일(渡日)하였다. 이어 야마모토 노부히로(山本信淵)로 개명해 완전히 일본인으로 행세했다. 그래서 배구자는 한국 무용사에서 배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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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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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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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진 출연의 '배구자의 타령춤'


노해진은 PAF 베스트 레퍼토리상 '사월을 버렸다 ­단종'(2009), PAF 올해의 전통재구성무상 '부채 산조 ­雅歌'(2011), 세종대왕전통예술경연대회 명인부 종합대상 '살풀이'(2017), 서울무용제경연작 '붉은나비'(2017),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작-'디스토피아'(2017), '깊은숨'(2017) 외 전통춤 개인 공연도 꾸준히 해왔다. 그녀는 비교적 조용하게 내공을 쌓아왔다. 복잡다단했던 사생활과 광복 후 문제의 행적 등으로 인해 지탄받아 온 역사적 인물 배구자의 작품을 재현하는 데 노해진은 주저함이 없었고, 공연은 소중한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제공=정동극장, 윤중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