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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단순한 충고와 조언 아닌 '마음의 밭'에 관심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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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충고와 조언 아닌 '마음의 밭'에 관심 가져야

[힐링마음 산책(308)] 인생을 바꾼 선생님의 말씀
지난 칼럼에서 사람은 왜 쉽게 변하지 않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 내용을 뒷받침할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부끄럽기도 한 개인사를 소개하는 것은 지난 칼럼의 내용을 실례를 들어 보완하려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교육대학부속 초등학교에 다녔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 서울에는 두 개의 특수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서울교육대학교 부속 초등학교였다. 당시에는 사립초등학교와 같은 특수학교가 없었다. 이 초등학교는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특별전형을 실시해 학생을 선발했다. 이 전형에서 불합격하면 일반학교로 취학하는 체계였다. 당시는 아동들이 많아 일반학교는 3부제 수업을 하는 곳도 많았고, 한 학급의 학생 수도 평균적으로 70여 명이 되었다. 하지만 위에 소개한 특수학교는 한 학급에 정원이 50명이었고 전체 학생 수도 적었다. 특히 모든 학생이 동일한 교복을 입고 다녔다. 겨울에는 운동장에 아이스링크를 만들어 스케이트를 타도록 배려해줄 정도로 학생들을 아껴주었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지금도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존함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즐거웠던 경험이었던 듯하다. 그 시절이 필자의 초기 인생에서 황금기였다. 특별히 학교 교복을 입고 등하교하는 재미도 좋았고, 반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탤런트 김자옥 님이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특수학교에다 교육 분위기도 좋아서인지 졸업생들은 거의 명문 중학교에 입학할 것을 당연시하면서 공부했다. 당시는 중학교의 서열이 뚜렷이 정해져 있었고, 입학시험에 합격해야 다닐 수 있었다.

비교적 공부를 잘했던 필자도 내심 서울에서 제일 좋은 명문 중학교에 진학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친구들이나 선생님도 필자에 대해 그렇게 예상하고 계셨다. 하지만 5학년 2학기 때부터 이상한 병에 걸렸다. 소위 “자반증(紫斑症)”이라는 병에 걸렸다. 온몸에 붉은 보라색 반점들이 나타나는 증상으로 당시에는 난치병에 속하는 것이었다. 피곤하기만 하면 증상이 도지기 때문에 거의 1년 동안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반요양 생활을 했다. 그 후 2학기 때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반 년 만에 원래 예상하고 있던 명문 중학교에 갈 실력을 닦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자존심이 상하지만 몇 단계 낮은 학교에 지원했는데 그마저도 불합격이 되었다.
재수를 하겠다고 했지만 열심히 공부하면 고등학교 입시 때 원하던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부모님의 강권에 못 이겨 후기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들어간 중학교가 만족스러울 리 없고 그 생활이 즐거울 수 없었다.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모두 결별했다.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더 이상 공부하는 데 흥미를 잃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절망에 빠진 생활을 했다. 친구도 사귀지 않았고, 학교 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 책가방에 소설책만 넣어 가지고 학교에 가곤 했다. 거의 삶을 포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필자가 이런 생활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던 선생님들은 마음을 돌려 공부를 하도록 만들려고 처벌도 하고 회유도 했지만 필자는 나름 요지부동의 태도를 견지했다. 선생님들이 필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할 때마다 오히려 반발심만 더 커져 갔다. 한마디로 그때의 기분을 말한다면 “당신들이 내 마음을 알아?”였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필자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며 삐딱한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급우들은 모두 운동장에 나가 놀고 있고, 필자는 텅 빈 교실에서 혼자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의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쳐다보니 교감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교실에는 필자 혼자 있었으니 분명히 필자 때문에 들어오신 것이었다. 교감선생님을 보자마자 필자의 마음에는 “오늘은 더 재수 없네…교감선생님에게도 한 말 들으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교감선생님 할아버지가 들어와 말씀하셔도 하나도 듣지 않는다”는 못된 결심까지 했다.

교감선생님이 필자에게 거의 다 오셨을 때 인사를 하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이 필자가 예상한 충고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다가오셔서 필자를 살며시 껴안아 주셨다. 당시 남자 학교에서는 교감선생님뿐만 아니라 일반 선생님들조차 학생을 껴안아 주는 경우는 참 드물었다. 순간 얼떨떨한 필자에게 교감선생님은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성열아, 너 아직도 마음이 그렇게 아프구나!”라고 다정스럽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지만, 곧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니 내장의 끝에서 걷잡을 수 없는 통곡이 터져나왔다. 교감선생님의 품 안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그동안 누구 앞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묻지 않았고 알아주지 않았던 마음속의 울분과 서러움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지난 5월 7일 부산 동래구 용인고등학교 교장실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 등 꽃을 선물하고 있다. 용인고는 2021년부터 인성교육 활동의 하나로 학생들이 부모를 비롯해 평소 고마웠던 분들에게 감사의 편지와 카네이션을 전달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스승의 날을 앞두고 지난 5월 7일 부산 동래구 용인고등학교 교장실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카네이션 등 꽃을 선물하고 있다. 용인고는 2021년부터 인성교육 활동의 하나로 학생들이 부모를 비롯해 평소 고마웠던 분들에게 감사의 편지와 카네이션을 전달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시간이 지나고 울음이 잦아들자 교감선생님이 다정하지만 힘을 주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열아, 분단된 조국 산하(山河)를 바라보면서 슬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필자도 모르게 “예!” 하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왔다. 중학교 들어와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필자에게 해준 말에 “예”라는 긍정의 대답을 했다. 그것도 그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씀에 대해….

이 두 마디 말씀을 하신 후 교감선생님은 교실을 나가셨다. 하지만 필자는 무엇에 홀린 듯 ‘멍’하니 정신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 솟아올랐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의 나태하고 절망적이던 생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교감선생님의 그 두 마디 말씀이 필자를 살리셨다. 그때 교감선생님이 교실에 외롭게 혼자 앉아있는 필자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필자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월이 지나 대학교수 생활을 한 몇 년 후 갑자기 “우리나라는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앞으로 통일을 해야 하는데 심리학자로서 어떤 연구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룬 독일의 심리학자들이 한국도 빨리 심리적 통일을 준비하라는 충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적·경제적 통일보다 심리적 통일이 오히려 더 어렵다는 실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원 과정에 ‘통일심리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2004년 화창한 봄날에 분단된 현실을 더욱 실감하기 위해 학생들과 판문점 견학을 갔다. 학생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별생각 없이 바로 코앞에 펼쳐져 있는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처럼 큰 소리가 들리더니 교감선생님의 말씀이 쩌렁쩌렁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성열아, 분단된 조국 산하를 바라보면서 슬픈 민족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라!” 깜짝 놀라서 혹시 교감선생님이 옆에 계신지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거렸지만 선생님이 계실 턱이 없었다.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교감선생님이 실제로 옆에 계실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분이 중학교 3학년 때 해주신 말씀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생생하게 들리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제자들과 ‘분단된 조국 산하를 바라보며’ 통일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교감선생님이 뿌려주신 씨앗이 거의 40년이 다 되어서 ‘통일심리학’이라는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필자의 이 경험을 통해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왜 다른 선생님들이 필자를 위해 진심으로 해주신 충고와 조언들은 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마음으로 튕겨냈는데, 유독 교감선생님의 말씀은 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네” 하고 받아들였을까? 교감선생님은 필자에게 공부하라는 충고의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잘 살아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신 것도 아니다. 그냥 당시에는 이해하지도 못할 말씀을 해주신 것뿐이었다.

그 이유를 필자는 상담심리를 공부하면서 깨달았다. 지난 칼럼에서도 밝혔듯이 교감선생님은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필자의 마음밭을 갈아주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씨라도 자갈밭에나 뿌리면 결실을 볼 수 없는 법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필자의 마음밭 상태에는 관심이 없고 좋은 ‘씨’, 즉 충고와 조언만 해주셨기 때문에 마음밭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감선생님은 필자의 마음속에 있는 울분과 서러움을 먼저 알아주시고 그것을 치워주셨다. 그것이 통곡을 하게 만들었다. 통곡으로 터져나온 감정이 바로 필자의 마음밭에 있었던 돌이었던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어김없이 그 교감선생님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속으로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사람 구실 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라는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명색이 ‘스승’으로 살면서 지식만 전하기보다 교감선생님처럼 먼저 학생들의 마음속의 돌을 치우는 스승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직은 너무도 미흡하지만.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이미지 확대보기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