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연구위원
요즘 교실에서 낯선 장면이 늘고 있다. 발표 시간에 말문이 막히고, 토론에서 자기 의견의 근거를 묻는 순간 침묵이 흐른다. 글쓰기 과제는 그럴싸하게 완성돼 있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쓴 문장은 찾기 어렵다.현장의 교사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AI에게 말하는 만큼,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못하는 아이들이 보여요.“
이것은 단순한 발표 불안이나 소심함의 문제가 아니다. AI와의 대화가 일상이 된 아이들에게서 나타나기시작한 소통 능력의 구조적인 퇴행이다.
AI는 완벽한 청자다. 불완전한 문장도 이해하고, 두서없는 말도 맥락을 파악해 깔끔한 답으로 돌려준다.핵심어 몇 개만 던져도 그 사이를 채워 완성된 문장을 만들어낸다. 편리하다. 그러나 바로 그 편리함이 문제다. 소통 능력은 마찰 속에서 자란다. AI는 그 마찰을 처음부터 제거해버린다.
사람과의 대화는 다르다. 상대는 내 말의 의도를 자동으로 채워주지 않는다.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근거가 부족하면 반박이 돌아온다. 상대의 표정과 침묵까지 읽어내야 대화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 불편한 과정을 버티고 돌파하는 경험이 쌓여야 비로소 사람과 대화하는 힘이 길러진다. AI가 그 기회를 조용히 빼앗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논의한 연구가 있다. 덴마크 오르후스대학교 심리행동과학과(Aarhus University)의 헤르베네르(Arthur Bran Herbener)와 담홀트(Malene Flensborg Damholdt)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인간-컴퓨터 연구(International Journal of Human-Computer Studies)》에 2025년 발표한 논문이다. 연구팀은챗봇이 현실의 대면 관계를 대체할 경우,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생겨나는 관점 전환의 기회가 위축될수 있다고 논의한다. 쉽게 말하면, 사람과 부딪히며 배우는 경험이 줄어들수록 타인의 말과 감정을 읽는능력도 충분히 자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구팀이 15개 고등학교 학생 1,599명을 분석한 결과, 챗봇과 친구처럼 정서적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친구나 가족이 내 편이 되어준다'는 느낌을 통계에서 유의미하게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미 외로운 아이들이 챗봇을먼저 찾는 것일 수도 있어 원인과 결과를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AI가 대화의 자리를 채울수록 사람과 나누는 진짜 소통의 기회가 줄어들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AI와 대화에 익숙해진 아이는 점차 '편집된 소통'에 길들여진다. AI와 대화할 때는 말을 다듬고, 지우고, 수정할 수 있다. 실시간으로 즉흥 반응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과의대화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상대가 시큰둥하게 반응하거나, 선생님이 논리의 허점을 짚거나, 친구가 내 주장에 반박할 때, 그 순간을 버티고 말을 다시 정돈하는 힘이 소통의 진짜 힘이다. AI는 그 힘을 쓸 일 자체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의 스테파니 응(Stephanie Ng) 박사가 미국 아동청소년 의학회 산하 학술지《JAACAP 커넥트(JAACAP Connect)》에 올해 발표한 임상 논평은 이 문제에 대해 임상의 관점에서 우려를 제기한다. 논평은 언제나 수용하고 감정으로 반응하는 AI 동반자 앱이 대면의 즉흥적인 인간 상호작용 대신 더 손쉬운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회복 탄력성과 갈등 해결 능력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하면, AI는 절대 화를 내지 않고 언제나 친절하기 때문에 아이가 편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바로 그 편안함이 문제다. 불편한 상황을 견디고 관계를 회복하는 경험 없이는, 현실에서 마찰을 다루는 힘이 충분히 자라지 못할 수 있다. 응 박사는 이를 이미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지금 임상과교육 현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위험 신호로 제시한다.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 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불완전한 말을 교정하려 하지 마라. 아이가 말을 더듬거나 논리가 엉킬 때, 부모가 곧바로 정리해주는 것은 AI가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대신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고 다시 묻고, 아이가스스로 문장을 완성하도록 기다려라. 말이 정돈되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게 하는 것, 그것이 소통능력을 키우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이다.
둘째, 반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험을 설계하라. 저녁 식탁에서 아이의 말에 "그게 왜 그렇지?"라고 묻고,주장이 허술하면 논리적으로 반박해 보라. AI는 절대 하지 않는 일이다. 반박을 받고 다시 논리를 세우는경험이 반복될 때, 아이는 의견과 감정을 분리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말에 책임감을 갖게 된다. 반박은상처가 아니라 소통의 훈련이다.
셋째, 요약이 아닌 말하기를 요구하라. 아이가 AI로 정보를 얻은 뒤, "그거 나한테 설명해봐"라고 말해보라. AI가 정리해준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서 상대에게 전달하는 행위는 단순한 내용 확인이 아니다.타인을 청자로 인식하고, 그 수준에 맞게 언어를 조율하며, 반응을 살피면서 설명을 다듬는 과정 전체가소통 훈련이다. 이 연습은 어떤 교육 프로그램보다 강력하다.
AI가 개떡같은 말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시대, 역설적으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다듬어 사람에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그 능력은 AI 앞에서가 아니라, 오해하고 반박하고 때로는 불편해하는 사람들과의 마찰 속에서만 길러진다.소통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부딪히고, 흔들리고,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이다. AI는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스며듦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