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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음악평론가의 오페라 이야기 ③ 유미주의적 현상의 오페라와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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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음악평론가의 오페라 이야기 ③ 유미주의적 현상의 오페라와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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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글룩이 음악을 보편적 언어로 생각했다는 점은 라모와도 한 맥락으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합리적이고 객관적 관점에 기초하여 전 계층에서 수용할 수 있는 통합된 비극 오페라의 관습을 창조한다. 글룩의 오페라 개혁이 이루어지고 계몽 시민들의 지위가 굳건해지면서 18C 진보적 움직임의 중심이 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오페라 공연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 오페라 제작 활동의 주도권은 귀족들이 선호했던 서정적 비극에서 시민들이 선호하던 오페라 꼬미끄(Opera comique)로 넘어가고 더 이상 신분 표현 내지는 특권층의 오락물로 기능하는 공연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45~1950년은 미국에서 본격적인 쿠르트 율리안 바일(KurtJulian Weill)의 음악 세계가 드러난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차대전(1939~1945) 후 유럽의 오페라는 수년간 정체되었다. 바일은 미국이란 나라에 새로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유럽에서 다년간 작업해 온 경험을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로 했고 19C 적인 좁은 의미와 감각에서의 음악으로 오페라를 해석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바일은 오페라 전통에 연연하지 않는 음악(Music theater)이란 용어의 개념을 선택한다면 미국에서 오페라 발전 가능성은 좀 더 명확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글룩(C. W. Gluck)은 칼짜비치의 이론을 실현하고자 했고, 이들의 합작품은 1762년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로 시작되어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오페라의 신념이 부분적으로 실현되며, 줄거리는 오페라 세리아에서 나타난 복잡함과 부차적인 것을 피하고 본질적인 이야기에 주목하여 전개된다. 1784년 프란츠 카를 라이헬트(Franz Karl Reichelt)가 주재한 연주회에서 청중에게 가사를 인쇄한 프로그램을 배부한 적이 있는데 성악곡을 들을 때에 관객들이 너무 떠들어서 가사의 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장 자크 루소는 프랑스 오페라가 작위적이고 화성적으로 복잡하며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어있다고 비난하면서 장 필리프 라모(Jean Philippe Rameau)의 화성에 관한 연구 역시 관습적인 미의 한 형식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같은 해, '마을의 점쟁이'를 발표했고, 이는 대중뿐 아니라 이탈리아 지지자들에게도 격찬받았다. 예술 영역에서 긍정적 문화는 현실에서 소외된 진리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현실 세계로부터 떼어놓는다. 예술에서 일어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실이 아닌 영역에 속하여 실제 삶 속에서 유효하지 않고 실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물음을 단절시켜 버린다.
언어를 중시하던 신고전주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언어와 이탈리아의 아리아 사이의 간극을 극복했고 프랑스 전통의 궁정발레와 극적인 줄거리의 융합으로 독창적인 수용이 이루어진 점이 역사적 의미를 준다. 18C 공연장에서 사교를 목적으로 오는 사람, 오락장으로 오는 사람, 작품에 귀를 기울이려는 사람이 뒤섞여 존재한 장소였다. 계몽 시민사회에서 예술은 사회 속에서 스스로 존재의 합리성을 찾고자 했다. 당대의 오페라에 관한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오페라는 점차 그 자체로 인식되면서 독립적 영역을 구축했고, 혁명기를 지나서 목적과 합리적으로 생산되는 경향을 띤다.

시민 계층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그들은 진정한 문화적 지지자가 되었고 작품 생산에 있어 그들의 반응은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시민들이 자아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제의적이거나 재현적인 목적 등 특수 용도로 제도화되지 않았고, 자율화되었다. 라모와 루소 중심의 부퐁논쟁은 오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백과전서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오페라 예술에 대한 계몽주의 정신이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도식화되고 세련된 것을 추구하던 신고전주의적 잔재가 점차 순수하게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던 계몽 진보파에 의해 청산되어 갔다.

해밀턴 뮤지컬이미지 확대보기
해밀턴 뮤지컬
조지 거슈원이미지 확대보기
조지 거슈원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는 오페라에서 과학과 예술의 원리를 혁신적으로 조화시키고자 했다. 시민사회 예술은 삶과 거리를 둠으로써 사회 비판을 가능케 하고 개인의 인간적 가치의 실현을 보장했다. 19C 말에 이르러 그런 성격 이 작품화되면서 시민사회 예술의 모순성, 인간적 가치와 이상 실현을 동경하지만, 예술 영역에서만 허용되기 때문에 실제 삶 속에서 유효하지 않았다. 오페라 꼬미끄는 청중 공감 범주의 인간 감정,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란 이념과 연관하여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준 사상들을 최대한 극에 표현하려 했는데 대표적으로 구원 오페라를 들 수 있다.

원래 정치 세력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인공이 구출되는 줄거리를 지니는 것으로 전제 정치와 인간의 불평을 주된 제재로 취하면서 혁명사상 고취에 일조하였다. 오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예술이 군주와 귀족들의 보호 아래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며, 예술의 지위란 범주도 예술 후원 집단에 의해 형성되는 크리스천 헨리에(Christian Henning)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다. 예술 생산에 있어 후원 집단이 경제 결정적 요소는 아니나 양식과 양식 간의 갈등과 변화는 둘 이상의 후원 집단 간의 사회적, 예술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술의 후원 제도는 다른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소유하는 후원자와 예술가 사이에 교환관계를 이룬다. 각각의 연기자들에 의해 새로운 종류의 소리가 생성되는 과정이 만들어진다는 특징을 지니며 현실적인 영역에서 주제로 채택하고 분석하며 시. 청각적인 행동양식으로 전환하여 다원적 복합체로 결합했다. 미국 상당수의 작곡가는 바일과 같이 미국 오페라에 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유럽에서 행해진 여러 가지 실험들로 자극받았으며 게오르그 안테일, 마크 블리츠슈타인, 버길 톰슨 등이 미국의 음악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유럽으로 향한다.

민중들은 노예 상태에 익숙하여 스스로 혁명을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혁명 주도 세력들에게 합창은 유일한 교육수단이며 혁명기는 국민 총화와 국민 계몽이란 목적을 위해 정치적 내용의 오페라와 합창이 다수 작곡되었는데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나 Monsigny의 오페라 꼬미끄가 그 실례다. 라모가 나타날 무렵, 륄리의 오페라는 지루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프랑스 오페라에선 선율의 표현력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다. 프랑스 오페라계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고, 이는 오페라를 독립된 장르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궁정과 봉건사회의 예술은 고전주의적 규범과 미학에 따라 제도화되었고, 오페라도 시대적 잣대 속에서 형식과 가치를 평가받았다. 오페라는 한때 궁정사회의 유희와 권력의 미학에 종속된 연극적 장르였으나, 점차 외적 목적과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작품 그 자체의 형식과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율적 예술양식으로 성장하면서 유미주의적 예술관의 싹을 틔웠다. 오페라는 종합예술로서 독자적인 미학적 체계를 구축하며, 궁정의 오락을 넘어 인간의 감정과 내면,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예술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 예술을 이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정순영(음악평론가 겸 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