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00억 달러 자산을 운용하는 버핏 회장이 포춘500 대기업 명단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작은 초콜릿 체인점 주식을 47년 전에 사서 보유하고 있다면 이 업체에는 뭔가 특별한 비법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초컬릿 체인 시스캔디(See's Candy)는 2018년 연간 매출이 4억3000만 달러 수준인 소규모 업체로 버크셔 해서웨이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2%도 안된다.
그러나 버핏은 99년 된 이 초콜릿 체인점을 자신이 꿈꾸는 '드림 비즈니스의 전형'이라고 추켜세우고, 각종 인터뷰에 이 회사를 종종 끌어들이곤 한다.
시스캔디의 출발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나무가 울창한 집이다.
1854년에 태어난 매리 시스는 그가 20세에 결혼해 남편과 사이에 세 아이를 둔 평범한 집에서 자신만의 초콜릿 조리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초콜릿을 만들었다.
1919년 아들 찰스가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민하자 당시 65세의 홀몸이었던 매리는 합류를 결정한다.
약국체인을 운영했던 아들 찰스는 산불로 약국들이 사라지자 잠시 캔디 영업사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생각으로는 가장 품질 높은 제품을 만나게 된다. 모친이 집에서 만든 초콜릿이었다.
찰스는 1921년 11월 어머니 매리와 함께 시스 캔디 1호점을 낸다. 신선한 재료가 들어간 다양한 초콜릿들이 상품이었다.
시스는 시작부터 소규모 생산을 통한 품질관리로 브랜드의 명성을 쌓아갔다. 캘리포니아 아몬드, 아프리카 초콜릿 등 최고 품질의 재료만을 고집했다.
어머니 매리의 얼굴을 박은 한 박스에 85센트짜리 초콜릿 포장박스에는 "타협하지 않는 품질"이라는 슬로건도 박았다.
1920년대 시스캔디는 점포 수를 12개로 늘렸다.
당시 한 할리우드의 신문사는 "매리의 제품 우수성은 그의 명성과 부의 유일한 요인이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1930년대 대공황,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속에서도 시스캔디는 원칙을 고수했다.
버터, 설탕, 크림이 엄격히 배급제로 제한되던 시절에도 다르지 않았다. 질 낮은 재료를 사용해 매출규모를 유지하거나 고품질 재료를 고집하는 대신 소량만 팔거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시스캔디는 후자를 택했다.
재고가 바닥나면 가게를 닫았다.
1939년 어머니 매리가 운명을 달리한 뒤 찰스, 그리고 그 뒤에는 그의 아들 로런스가 유산을 물려받았고, 160여개 점포를 거느린 체인으로 키워냈다.
1970년 시스의 행운이 다한 순간 오마하의 현인 버핏이 시스캔디의 문을 두드렸다.
버핏은 시스캔디를 인수하자마자 낙하산병 출신으로 시스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찰스 히긴스를 CEO로 앉혔다.
버핏은 히긴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결코 이윤을 위해 품질을 희생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또 지나치게 빠른 확장에 나서지 말 것과 '제한된 규모로' 각 지역 내에서만 초콜릿을 만드는 지금의 관행도 그대로 이어가라고 주의를 줬다.
버핏은 시스의 몸집을 키우는 대신 고품질과 소규모 생산에 따른 프리미엄 전략을 지속했다.
그는 시스의 최대 강점으로 3가지를 꼽았다.
시스가 자체적으로 충성심 높은 고객들을 만들어냈고, 이들 고객은 시스 제품에 너무도 만족해 가격 인상도 개의치 않는다. 또 시스는 영업자본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3가지였다.
앞으로 10년 동안 시스의 점포 확장 계획도 매우 보수적이다. 167개에서 214개로 연간 2% 정도만 증가하는 수준이다.
또 총 초콜릿 매출 규모도 1690만 파운드에서 2470만 파운드로 연간 3% 증가하는 수준에 그치도록 계획이 잡혀있다.
이는 박스포장 초콜릿 시장의 확장성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 외에도 품질이 성패를 좌우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스는 점포와 판매 증가율이 각각 2%, 3%에 그친 상황에서도 파운드당 초콜릿 가격을 연간 10%씩 인상했다. 물가상승률을 크게 웃돈다.
기업 성패의 한가지 요인은 양적 성장보다 고품질 유지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김미혜 글로벌이코노믹 미국 통신원 LONGVIEW@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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