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무기' 현금 잔액형 401(k) 한도 초과 저축 가능
.2001년 1477개서 2020년 2만3000개로 15배 증가
.2001년 1477개서 2020년 2만3000개로 15배 증가

미국 의사, 변호사, 회계사들이 일반적인 401(k) 은퇴계좌 외에 세금 혜택을 받으며 대규모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Cash Balance Plan)'이 급성장하고 있다.
이는 고용주가 직원의 가상 계좌에 정기적으로 돈을 적립하고 보장된 수익률을 제공하는 하이브리드형 은퇴 제도다. 지난 8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이 퇴직연금은 현재 총 1조 2000억 달러(약 1,746조 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가입자가 크게 늘고 있다.
플랜 관리자인 애센서스(Ascensus)의 퓨처플랜(FuturePlan) 자료에 따르면,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을 도입한 고용주 수는 2001년 1,477명에서 2020년 약 2만3000명으로 20년간 15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2010년 7,500개에서 2020년까지 3배 가까이 급증했다.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401(k) 은퇴계좌보다 연간 납입 한도가 훨씬 높다는 점이다. 이 제도는 법적으로 전통적인 연금으로 분류되어 401(k)의 납입 한도 제한을 받지 않아, 고소득자들이 더 많은 금액을 세금 이연 혜택을 받으며 저축할 수 있다. 연령과 소득에 따라 다르지만, 고령 고소득자는 연간 최대 38만 달러(약 5억 5000만 원)까지 세금 혜택을 받으며 저축할 수 있다. 반면 일반 401(k)의 2025년 기준 연간 납입 한도는 직원 부담금 최대 2만3500달러, 고용주 매칭 및 이익 공유로 최대 4만6500달러에 그친다.
텍사스의 방사선 종양학자 빅터 망고나(44)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고용주가 내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 계좌에 급여 중 11만 달러를 불입했고, 401(k)에도 추가로 자신이 2만3000달러, 고용주가 4만6000달러를 납입했다"고 밝혔다. 망고나와 의사인 아내는 지난 10년간 총 260만 달러(약 38억원)를 저축했으며, 빅터는 65세까지 약 1000만 달러(약 146억 원)를 모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명확하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은 긴 교육 기간과 학자금 대출로 은퇴 저축을 늦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짧은 기간에 대규모 자산을 축적할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퇴한 심장 전문의 로버트 마스터는 "2000년경 우리 병원이 이 퇴직연금을 도입했을 때, 많은 고령 동료들이 학교와 수련 기간으로 인해 은퇴 저축이 부족했다"고 회상했다. 마스터는 2018년 은퇴 시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 계좌 200만 달러를 401(k)로 전환해 총 300만 달러 이상의 은퇴 자금을 확보했다.
퓨처플랜의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 책임자 댄 크라비츠는 "2006년 법으로 합법성이 확인된 후 소규모 회사에서의 도입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이 퇴직연금 제도는 1990년대 중반 IBM 등 대기업들이 전통적 연금의 비용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1996년 의회가 연금과 401(k) 동시 가입자의 총 저축액 한도를 제거하면서 활성화됐다.
옥토버 쓰리 컨설팅의 파트너 존 로웰은 "401(k)와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의 기여 한도 차이는 세단과 스포츠카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하나는 모두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위층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판도 있다. 비영리 조세 정책 센터의 전 선임 연구원 스티븐 로젠탈은 이 플랜이 "소득 분배의 최상위층에게 횡재"를 안겨준다고 지적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자료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 가구가 401(k) 스타일 플랜 자산의 70%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 은퇴 제도 내 불평등이 심화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 컨설턴트들은 국세청(IRS) 규정상 이를 도입하는 회사들이 저임금 직원들에게도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소규모 회사들은 일반적으로 연소득 15만5000달러 미만 직원 계좌에 급여의 5~7.5%를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이 퇴직연금 제도는 의료·법률 회사에서 시작해 부동산 개발업자, 중개인, 디자인 회사, 심지어 정비소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직원 복리후생 컨설팅 회사 센티넬 그룹의 제리 시칼레세는 전했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정부는 은퇴 저축 장려를 위해 매년 약 3000억 달러의 세수를 포기하고 있다. 최신 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500만 달러 이상 고액 개인퇴직계좌(IRA)는 2011년에서 2019년 사이 28,000개로 3배 이상 증가했는데, 이는 현금 잔액 플랜에서 IRA로 자금이 이전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금 잔액형 퇴직연금의 급성장은 미국 은퇴 계획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로, 한국의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도 장기적 은퇴 설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