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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만성 질환 그림자 짙어진 미국 건강… 기대 수명, 선진국 중 '최하위권'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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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만성 질환 그림자 짙어진 미국 건강… 기대 수명, 선진국 중 '최하위권' 충격

美 국민, 선진국 중 유일하게 기대 수명 정체
오피오이드·비만·미흡한 예방 관리…'만성 질환 쓰나미'에 취약
만성 질환 그림자가 미국 건강을 덮치며 충격을 주고 있다. 비만, 오피오이드 문제 등으로 기대 수명마저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정체,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만성 질환 그림자가 미국 건강을 덮치며 충격을 주고 있다. 비만, 오피오이드 문제 등으로 기대 수명마저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정체,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사진=로이터
미국인들이 다른 고소득 국가 국민들보다 더 짧고 덜 건강한 삶을 산다는 충격적인 분석 결과가 나왔다. 과거 감염성 질환이 주된 위협이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만성 질환이 미국 건강의 가장 큰 재앙이 되었다는 진단이다. 비만, 나쁜 식단, 신체 활동 부족 등 생활 습관 문제와 파편화된 의료 시스템이 만성 질환 확산을 부추기며 기대 수명 정체를 야기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14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인플루엔자(influenza)와 결핵(tuberculosis) 등 감염성 질환이었다. 위생 환경 개선과 항생제·백신 개발 덕분에 이러한 질병들은 억제됐고, 미국인 건강 상태는 크게 개선됐다. 이후 의료 혁신과 금연 캠페인으로 심장 질환과 암 퇴치에서도 수십 년간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오래 이어지는 만성 질환이 이러한 긍정적인 흐름을 약화시키고 있다. 특히 지난 10년간 미국 기대 수명은 정체 상태에 머물며 다른 부유한 국가들에 뒤처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80년부터 2020년까지의 기대 수명 추이를 보면, 미국은 다른 비교 대상 국가 평균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기대 수명 격차의 상당 부분은 근로 연령 성인의 사망률 때문이라고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Virginia Commonwealth University)의 스티븐 울프(Steven Woolf) 기대 수명 연구원은 분석했다. 그는 "미국인들은 다른 고소득 국가 국민들보다 더 일찍 죽고 더 병든 상태다. 이는 오랫동안 사실이었으며, 그 추세는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 조기 사망과 만성 질환의 연결고리

연구자들은 오피오이드(opioids) 약물 과다 복용, 알코올, 자살, 그리고 만성 질환이 이러한 조기 사망의 대부분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위험도가 낮은 젊은 성인들 사이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미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더 큰 피해를 본 것도 근본적인 건강 상태 문제와 관련이 깊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이미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바이러스 피해에 더 취약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비만율이 다른 비교 대상 국가 평균의 거의 두 배에 이른다는 점도 이전 수십 년간의 심장 질환 퇴치 노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커먼웰스 펀드(Commonwealth Fund)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약 3분의 1이 두 가지 이상 만성 질환을 앓고 있다. 이는 비교 대상 국가들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고혈압과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 발병률은 최근 수십 년간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당뇨병 유병률은 증가 추세다. 연구자들은 당뇨병 유병률 증가는 부분적으로 사람들이 이 질병을 가지고 더 오래 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비교 대상 국가들에 비해 이러한 질환의 발병률이 더 높다. 1990년부터 2020년까지의 질환 유병률 변화를 보면 비만율이 특히 가파르게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예방 가능한 많은 만성 질환은 네 가지 주요 위험 요인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흡연, 과도한 음주, 신체 활동 부족, 나쁜 영양 상태다. 연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은 일부 유럽 국가 국민들보다 운동량이 적고 신체 활동이 부족하다. 미국의 서구식 식단은 설탕, 가공육, 건강에 해로운 지방 함량이 높다.

특히 초가공 식품(ultra-processed foods) 섭취량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많은 것으로 조사되며, 이러한 식단은 비만, 2형 당뇨병, 일부 암의 위험 증가와 연관된다. 여러 국가별 성인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 중 초가공 식품 비율을 비교한 그래프에서 미국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 파편화된 의료 시스템의 민낯

연구자들은 파편화된 미국 의료 시스템 또한 건강 상태 부진에 기여하는 주요 원인 하나로 꼽는다. 다른 비교 대상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국민 전체의 의료 보장(healthcare coverage)을 보장하지 않는다. 높은 의료 비용 때문에 한 사람 앞 지출은 많지만, 비용 부담으로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건너뛰는 미국인이 많다는 보고가 잇따른다. 비용 때문에 의료 서비스를 건너뛴다고 응답한 성인 비율을 보면 미국이 다른 여러 선진국보다 월등히 높다. 또한 데이터는 미국이 많은 비교 대상 국가보다 한 사람 앞 의사 수가 적음을 보여준다.

보스턴 칼리지(Boston College)의 필립 랜드리건(Philip Landrigan) 글로벌 공중 보건 프로그램 책임자는 미국이 복잡한 질병 치료에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질병 관리나 예방에 도움이 되는 치료와 서비스 접근성을 제공하는 데는 "더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 소득에 따른 건강 불평등 심화

소득에 따른 건강 격차 문제도 심각하다. 부유한 미국인들은 저소득층보다 만성 질환 발병률이 낮고 더 오래 산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은 유럽 국가들보다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사망률 격차가 더 크다. 더욱 놀라운 점은 가장 부유한 미국인조차 북유럽 및 서유럽의 가장 가난한 사람과 비슷한 사망률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뛰어난 치료 능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예방과 관리 시스템 미흡, 생활 습관 문제, 의료 시스템의 접근성과 형평성 문제 등으로 만성 질환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국민 건강 악화와 기대 수명 정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