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법인 설립 허점 노려 자금세탁·유통 지휘…DEA, '일본 총책' 추적
'마약 청정국'은 옛말…日, 국제 범죄 '보이지 않는 전쟁터' 되나
'마약 청정국'은 옛말…日, 국제 범죄 '보이지 않는 전쟁터' 되나

사건의 발단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 중국 기업 재판이었다. DEA는 위험 약물을 미국에 불법 유통시킨 혐의로 2023년 6월 중국 국적의 왕칭저우와 천이이를 체포했다. 중국 우한의 화학업체 '후베이 아마르벨 바이오테크' 간부였던 이들의 수사 과정에서 '일본에 있는 총책'의 존재가 처음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왕칭저우는 수사 과정에서 "우리 회사에는 우두머리가 두 명 있다. 한 명은 일본에 있고, 다른 한 명이 바로 나라고 고객들에게 이해시켰다"고 진술했다.
◇ OSINT 추적…드러나는 '일본 총책'의 정체
샤는 중국과 일본, 미국 등 18개 기업의 주주로 활동하며 국제 연결망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일본을 거점으로 삼은 까닭은 서구보다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마약 원료 관리와 낮은 법인 설립 문턱을 악용했다는 분석이다. 일본은 자본금 500만 엔(약 4691만 원) 같은 낮은 요건만으로 법인을 세울 수 있어 범죄 조직의 위장 기업 설립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日 법인 허점 악용…나고야를 '자금세탁·지휘 본부'로
샤가 대표인 나고야의 FIRSKY는 표면상 건축 자재와 화학품 수출입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미국에서 적발된 아마르벨과 같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금융·물류 기반을 활용해 자금 세탁과 마약 유통을 지휘하는 아시아 본부 역할을 했다.
특히 미국에서 아마르벨 재판이 한창이던 지난해 7월, 나고야의 FIRSKY는 갑자기 청산 절차를 밟았다. 이는 왕칭저우가 우한의 푸스카이 무역 감사직을 그만둔 때와 겹쳐, 조직적인 증거 인멸 시도였을 가능성을 키운다.
◇ 美 덮친 '펜타닐 재앙'…'신 아편전쟁' 현실화
이 사건은 미국 내 심각한 펜타닐 문제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10만 명 이상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며, 대부분 펜타닐 같은 합성 마약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중국이 원료 물질을 멕시코 카르텔에 공급한다고 비판하며 관련 기업과 개인의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중국은 2019년 이후 펜타닐을 전면 규제했지만, 온라인과 유령회사를 통한 편법 유통은 계속되고 있다.
아마르벨은 멕시코 최대 마약 조직인 '시날로아 카르텔'과 관계를 과시하며 DEA 위장 수사관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2023년 3월 태국 방콕에서 이뤄진 함정 거래에서 아마르벨 쪽은 "뉴욕에 마약 제조 시설을 만들고 싶다"는 수사관의 말에 "멕시코나 미국에 제조법을 아는 고객이 많다. 완성품을 파는 데 도움이 필요하면 멕시코 고객에게 연락도 해줄 수 있다"며 대담하게 거래를 제안했다.
◇ "일본, 더는 안전지대 아냐"…보이지 않는 전쟁터 우려
왕과 천은 피지에서 DEA에 붙잡혀 미국으로 옮겨졌고, 올해 1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조직의 정점으로 보이는 샤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지금까지 일본은 직접적인 펜타닐 남용 위기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국제 마약 밀수의 핵심 중계지로 악용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새로운 싸움터가 될 수 있다며, 외국인 대상 기업 설립 제도와 금융·물류 시스템의 감시 체계 강화, 그리고 국제 공조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21세기 신 아편전쟁'이라 불리는 국제적 위협이 일본의 안방까지 들이닥친 셈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