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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법원 '전국 효력 금지명령' 폐기로 '무국적 아동' 대량 발생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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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법원 '전국 효력 금지명령' 폐기로 '무국적 아동' 대량 발생 우려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연방대법원.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연방대법원. 사진=로이터

미국 연방대법원이 전국 단위의 효력 정지 명령을 금지하면서,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자 자녀들이 법적 신분 없이 살아가야 하는 '대규모 무국적 실험'이 시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번 판결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서명한 행정명령을 둘러싼 소송에서 6대 3으로 내려졌으며 이에 따라 미국 시민권 출생 원칙이 사실상 무력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국 단위의 효력 정지 명령이란 미국 연방 지방법원이 특정 정책이나 행정 조치에 대해 당사자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법적 효력을 가진 가처분 명령을 뜻한다. 즉, 해당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원고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호받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예컨대 어느 주의 연방 판사가 이민 관련 명령을 위헌이라 판단하면 그 명령이 미국 전역에서 적용되지 않도록 전면적으로 중단시키는 효과를 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미국에서 태어난 아동이라도 어머니가 불법체류자이거나 임시 체류자(학생·관광·취업 비자 등)일 경우, 그리고 아버지가 미국 시민 또는 영주권자가 아닐 경우 자동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한 바 있다.

◇ 행정명령 14160호, "불법체류자 자녀는 시민 아니다"


30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에 따르면 트럼프가 서명한 행정명령은 미국 내 불법체류자 또는 임시 체류 신분을 가진 이들의 자녀가 미국에서 출생했더라도 시민권을 자동으로 부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미국 수정헌법 14조가 보장하는 속지주의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이번 대법원 판결은 그 위헌 여부를 따지지 않고 사법적 견제를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법원은 "미국 연방법원은 18세기 영국 법정이 인정하던 범위 내에서만 구제 조치를 내릴 수 있다"며 전국 효력의 가처분 명령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그 결과 미국 전역에서 이 명령의 시행을 막을 방법은 사라졌다. 판결 이후 이 명령은 30일 안에 최소 28개 주에서 시행될 예정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병원에서 출생신고를 못 하고 사회보장번호를 발급받지 못한 채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현실화된 것이다.

◇ "같은 날 태어난 두 아이, 주마다 시민권 여부 달라져"


슬레이트는 "이제 같은 날 태어난 두 아이가 단지 출생한 주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혀 다른 법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주는 시민권 박탈을 막기 위해 자체 법률이나 행정명령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주에서는 신생아가 출생증명서도 없이 자라게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판결에 반대하며 "법치주의에 대한 비극"이라고 공개 반발했고, 케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은 "이번 판결은 헌법이 막으려 했던 자의적 권력 행사를 대통령에게 허용한다"고 경고했다.

◇ 시민권 부정, 행정으로 '조용히' 이뤄진다


이번 조치는 기존 대법원 판례인 '웡 김 아크 사건(1898)'의 취지를 정면으로 뒤엎지는 않지만 행정적 권한을 이용해 사실상 그 효력을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웡 김 아크 판결은 미국에서 태어난 중국인 부모의 자녀가 미국 시민임을 인정한 바 있다.

슬레이트는 "무국적화는 드라마틱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출생증명서가 오지 않고 사회보장번호가 발급되지 않으며 병원 진료나 학교 등록을 거부당하는 '조용한 배제'로 삶 전반을 뒤흔든다"고 지적했다.

◇ 국제 사회의 '조용한 배제' 사례도 경고


슬레이트는 "미얀마의 로힝야, 도미니카공화국의 아이티계 주민, 쿠웨이트의 비둔, 레바논과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난민도 모두 법적 신분 부정이 차별과 폭력을 불렀다"며 "미국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매체는 "무국적화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주민번호가 없어 어린이 급식, 백신, 교육조차 받을 수 없는 삶이 될 수 있다"며 "의회가 헌법상 출생시 시민권을 명확히 입법화하지 않는 이상, 대법원 판결은 더 많은 신생아를 법 밖에 놓이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