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정부 재정 적자·정치 불안에 '평가절하 거래' 확산
금값 50% 폭등·비트코인 최고가…'대안자산'으로 자금 대이동
금값 50% 폭등·비트코인 최고가…'대안자산'으로 자금 대이동

지난 14일 시장의 관심은 미국과 중국의 새로운 관세 위협에 쏠렸다. 투자자들은 위험자산을 팔고 채권시장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시장 표면 아래에서는 더 큰 구조 변화가 꿈틀대고 있었다. 바로 '평가절하 거래'다. 정부가 천문학적인 빚 부담을 해결하려고 통화가치를 일부러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에 바탕을 둔 투자 전략이다.
정부의 적자 확대, 통화량 증가, 중앙은행에 대한 정치 압박으로 현금과 국채의 가치가 오랜 기간에 걸쳐 떨어질 것이라는 걱정에서 비롯된다. 이 전략을 믿는 투자자들은 국채와 해당 통화의 미래 가치를 깊이 불신하며 자금을 빼고 있다.
이런 우려에 기름을 붓는 것은 각국 중앙은행이 처한 현실이다. 정부의 빚 이자 부담을 낮추기 위해 금리를 낮게 유지하라는 정치 압박에 시달릴 것이며, 이 과정에서 계속 돈을 풀어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비관론이 퍼져 있다.
커지는 '기축통화 불신'…흔들리는 안전자산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경기 부양론자인 다카이치 사나에의 총리 취임 가능성이 떠오르자 엔화와 일본 국채가 투매(投賣)에 시달렸다. 프랑스는 재정 문제를 둘러싼 정치 혼란으로 유로화가 충격을 받았고, 영국 국채(길트) 시장은 2022년 리즈 트러스 총리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대규모 매도 사태의 악몽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최근 미국 정부의 일시 업무정지(셧다운) 사태에도 달러 가치가 잠시 올랐지만, 올해 전체 흐름을 보면 약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 전쟁과 세금 감면 정책은 1970년대 초 이후 가장 큰 폭의 달러 가치 하락을 초래했다. 그의 '미국 우선주의'와 연방준비제도(Fed) 독립성을 해치려는 시도는 세계 최고 무위험 자산인 미국 국채의 지위마저 흔들고 있다. 물론 미국 국채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보유량이 여전히 늘고 있지만, 일부 대형 연기금과 헤지펀드가 미국 국채, 유로, 엔 같은 기존 자산 대신 금을 더 찾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평가절하 거래의 반대편에 선 자산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전통 안전자산인 금은 올해에만 50% 넘게 폭등하며 온스당 4000달러를 넘었고, 은값 역시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정부 정책의 영향에서 자유롭다는 인식이 퍼진 암호화폐도 상승세를 보였다. 비트코인은 최근 조정에도 연초보다 20% 이상 오르며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GSFM의 스티븐 밀러 컨설턴트(전 블랙록 호주 채권 부문 대표)는 "40년간 시장에 몸담으면서 통화와 국채에서 대안 자산으로 이처럼 큰 자금 이동은 본 적이 없다"면서 "평가절하 거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미국 국채는 더는 과거처럼 완벽한 피난처가 아니며, 이는 다른 채권시장에서도 되풀이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억만장자 투자자인 레이 달리오와 켄 그리핀은 "금이 달러보다 안전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나심 탈레브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미국 적자는 피할 수 없는 부채 위기의 씨앗"이라고 지적했다. 싱가포르 블루 에지 어드바이저스의 캘빈 여는 "세계는 통화의 실질가치 하락뿐 아니라 정부 안정성의 악화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거품 낀 모멘텀 거래" 반론도 만만찮아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세계 금융위기 뒤 부채위기에 대한 성급한 경고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현실화하지는 않았다. 금과 비트코인 급등에는 러시아 자산 동결에 따른 외환보유고 다각화 수요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금과 비트코인 등은 단기로는 추세를 좇는 투기 성향이 강하고, 최근 미·중 관세 갈등처럼 지정학적 위험이 커질 때는 변동성이 커지기도 한다.
일본 미즈호 증권의 오모리 쇼키 수석 전략가는 "통화와 채권을 비트코인과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라며 현재 흐름을 기초여건과 무관하게 투자자들이 몰려드는 '추세 추종 거래(모멘텀 트레이드)'로 봤다.
그러나 평가절하 논쟁이 힘을 얻는 이유는 뚜렷하다. 유리존 SLJ 캐피털은 "각국 정부가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거치며 중앙은행이 공급한 값싼 돈에 기댄 '적자 지출'에 중독됐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만약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와 금의 비중이 같아진다면, 금값은 85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안드로메다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알베르토 갈로는 "빚이 늘고 인구가 늙어가는 시대에 정치인들은 성장 촉진이나 긴축보다 통화가치 하락이라는 손쉬운 길을 택할 것"이라면서 "이는 인플레이션 고착화와 법정 화폐 가치의 추가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회계감사원은 현재 추세대로라면 2050년 미국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세금 감면으로 재정적자를 더욱 키우고 연준에 금리인하를 압박하는 모습은 평가절하 우려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런던 XTB의 캐슬린 브룩스 리서치 디렉터는 "현재 자산 시장 변화는 디지털 자산이 더 신뢰받는 가치저장 수단이 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면서 "이런 흐름은 가까운 시일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 중앙은행의 독립성 약화, 정치 혼란 같은 구조적 위험이 계속되면 화폐가치 하락, 인플레이션 장기화, 안전자산 선호 현상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