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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탓 아니다" 전기요금 폭탄의 진짜 배후는 '관치 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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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탓 아니다" 전기요금 폭탄의 진짜 배후는 '관치 규제'

美 WP "데이터센터 전력 급증 속, 환경 규제가 공급 목줄 죄어"
2028년 '에너지 절벽' 경고... 韓 반도체 송전망도 '규제 늪'에 비명
인공지능(AI) 혁명이 불러온 전례 없는 전력 수요 급증이 미국 가정의 전기요금 고지서를 위협하고 전력망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은 정치 논리에 갇혀 에너지 공급을 가로막는 낡은 규제와 관료주의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인공지능(AI) 혁명이 불러온 전례 없는 전력 수요 급증이 미국 가정의 전기요금 고지서를 위협하고 전력망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은 정치 논리에 갇혀 에너지 공급을 가로막는 낡은 규제와 관료주의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지=제미나이3
인공지능(AI) 혁명이 불러온 전례 없는 전력 수요 급증이 미국 가정의 전기요금 고지서를 위협하고 전력망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사태의 진짜 원인은 AI라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정치 논리에 갇혀 에너지 공급을 가로막는 낡은 규제와 관료주의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4(현지시각) “미국 전력망을 질식시키는 진짜 문제는 기계(AI)가 아니라 붉은 테이프(관료적 규제)"라고 보도했다. 현재 미국이 겪는 전력난과 가격 급등은 시장 실패가 아닌, 워싱턴과 주 정부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공급 부족'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수요는 폭발하는데 공급은 '동맥경화'


현재 미국 내 데이터센터는 국가 전체 전력의 약 4%를 소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수치가 오는 2028년에는 12%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본다. 정상적인 시장 경제라면 수요 폭발과 가격 상승은 곧 투자를 유발해 공급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미국 에너지 시장에서는 이 공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WP"오늘날 미국에서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공학적 도전이라기보다 관료주의적 인내심을 시험하는 과정이 됐다"고 꼬집었다. 현재의 전력 가격은 과거 정책의 성적표다. 천연가스 발전소 하나를 가동하는 데 최대 5년이 걸리는데, 실제 건설 기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인허가 과정에서 허비된다.

특히 미국 전력 생산의 핵심인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지연은 심각한 수준이다. 미 에너지정보청(EIA) 데이터에 따르면,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주()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용량 추가분은 1995년 집계 시작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늘어난 인허가 기간이 현 정부 들어 정점을 찍으며 에너지 공급의 동맥을 끊어놓은 셈이다.

'넷제로' 도그마가 부른 요금 폭탄


문제의 또 다른 축은 과도한 환경 규제다. 워싱턴 D.C.24개 주 정부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탄소 중립(Net-Zero)' 혹은 '100% 청정에너지' 의무화 정책을 시행 중이다. 이는 풍력과 태양광 발전을 강제하는 동시에, 석탄과 천연가스 발전소의 신규 건설을 막고 기존 시설마저 조기 폐쇄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풍력과 태양광은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들쑥날쑥한 '간헐성'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다. 전력망 안정을 위해서는 예비 전력과 저장장치, 송전망을 과도하게 지어야 하므로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오리건주의 사례는 이러한 정책의 부작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리건주 주거용 전기요금은 2020년부터 2024년 사이 30%나 폭등했다. 포틀랜드 제너럴 일렉트릭(PGE)2020년 보드먼 석탄 화력발전소를 폐쇄했다. 이 발전소는 경제성이 충분했고 9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하는 핵심 시설(전체 전력 믹스의 15%)이었지만, 환경단체 소송에 따른 2011년 합의로 예정보다 20년이나 일찍 문을 닫아야 했다. 뉴잉글랜드 지역이 모든 석탄 발전소를 폐쇄하고, 뉴욕주가 2021년 인디언 포인트 원전을 닫은 후 전력난을 겪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28'에너지 절벽' 경고... 시장 자율성 회복이 해법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닥칠 '공급 절벽'이다. EIA는 현재 가동 중인 미국의 석탄 발전 용량이 172기가와트(GW)에서 2028145GW로 급감할 것으로 전망했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폭발하는 바로 그 시점에, 안정적인 기저 부하를 담당하던 발전소들이 강제로 퇴출당하는 것이다.

WP는 정치권이 요금 상승에 대응해 '가격 통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석유 가격 통제 정책이 주유소의 긴 줄과 공급 부족만 초래했듯, 전기요금 상한제는 발전소 투자 위축과 정전 사태, 그리고 혁신의 지체를 부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매체는 "AI의 발전과 저렴한 전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은 명확하다"며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파이프라인과 발전소 건설을 지연시키는 인허가 절차 대폭 간소화 ▲경제성 있는 발전소를 강제 폐쇄하는 주 단위 넷제로 의무화 폐지 ▲새로운 민간 전력망의 자유로운 경쟁 허용 ▲에너지 인프라 건설 비용을 높이는 보호무역 관세 철폐 등이다.

WP워싱턴과 주 정부가 쳐놓은 규제 장벽이 무너지지 않는 한, 모든 새로운 AI 데이터센터는 정치권이 만든 요금 인상의 억울한 희생양이 될 것"이라며 "석탄, 천연가스, 원자력, 신재생에너지가 정치적 특혜가 아닌 비용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경쟁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기 먹는 하마' AI·반도체... 한국도 '송전망 동맥경화'가 최대 암초


미국이 겪고 있는 '전력망 병목' 현상은 한국 전력 시장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위기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함께 한국 경제의 생명줄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고 있지만, 전력을 실어 나를 송전망 건설은 주민 수용성 문제와 인허가 지연이라는 '규제와 민원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공사가 수립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오는 2038년까지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 조성 등으로 인해 추가로 필요한 발전 설비만 10.6기가와트(GW)에 이른다. 특히 경기 용인에 조성 중인 '첨단 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는 수도권 전력 수요의 블랙홀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047년까지 622조 원을 투자하는 이 메가 클러스터가 가동되려면 장기적으로 10GW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다. 이는 현재 수도권 전체 전력 수요의 4분의 1에 맞먹는 규모다.

문제는 전기를 만들어도 보낼 길이 막혀 있다는 점이다. 동해안의 원자력·석탄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송전(HVDC)' 선로는 당초 2019년 완공 목표였으나, 주민 반대와 입지 선정 난항으로 2026년 이후로 개통이 미뤄졌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거북이 인허가'가 전력 공급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에너지 업계 전문가들은 미국의 사례를 타산지석 삼아 '전력 고속도로' 건설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한 에너지 전문가는 최근 한 에너지 포럼에서 "송전망 건설 지연은 단순히 한전의 적자 문제를 넘어 국가 첨단 산업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핵심 요인"이라며 "국가가 직접 나서서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고 주민 보상을 현실화하는 등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용인 반도체 공장이 멈춰 서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넷제로' 강박에서 벗어나 시장 원리를 강조하듯, 한국 역시 이념을 배제한 현실적인 에너지 믹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간헐성이 큰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무리하게 늘리기보다, 용인 클러스터와 같은 대규모 수요처에는 원자력과 LNG(액화천연가스) 등 기저 부하 전원을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연한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분석이다.

미국 워싱턴 정가의 관료주의가 만든 전력난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표류하는 한국의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과 오버랩되며 한국 경제에 묵직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