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화하는 미중 패권 경쟁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을 떠나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미국의 대전략 변화가 동아시아와 한국에 던지는 전략적 경고
이미지 확대보기유럽 문제는 유럽의 문제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유럽을 동맹이 아닌 경쟁자이자 고객으로 재정의하는 순간, 이는 단순한 대서양 관계의 변화를 넘어 세계질서의 구조적 전환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유럽에 대한 미국의 시각 변화는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된 시대에 미국이 더 이상 모든 지역을 동일한 방식으로 관리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유럽은 더 이상 미국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공동체가 아니라, 비용과 이익의 계산표 위에 올려진 하나의 전략 공간이 되었다.
이 같은 변화의 본질은 감정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중국이라는 체제적 경쟁자와 장기 경쟁에 들어가면서 선택한 구조적 재편의 결과다. 미국이 미중 패권 경쟁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이 같은 현실에 대해서는 유럽의 안보 매체들이 역내 종합 뉴스 매체들보다 앞선다. 이들 안보 매체는 미국이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서서 세계질서를 전부 ‘관리’하기보다는 지역을‘선별’해서 관리하기로 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모든 지역에 동일한 수준의 동맹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이 판단은, 유럽에서 먼저 드러났을 뿐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한국은 동아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이 동아시아로 중국과의 패권 경쟁을 위해 동아시아로 이동하더라도 역내 모든 동맹에 대해 무조건적인 안보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트럼프의 유럽 인식은 미중 경쟁의 함수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 유럽관은 ‘미국 우선’이라는 구호보다 더 깊은 전략적 계산 위에 서 있다. 미국이 중국과의 장기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줄이려는 것은 동맹 유지 비용이다. 유럽연합은 그 비용이 가장 크고, 동시에 미국의 전략적 자유도를 제한하는 존재라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다.
미국은 유럽이라는 집단적 행위자와 협상할 때보다, 개별 국가와 거래할 때 훨씬 우위에 선다. 이는 단순한 협상술이 아니라 패권국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트럼프가 유럽연합을 경시하고 개별 국가와의 직접 거래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미중 경쟁이라는 더 큰 게임에서 미국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트럼프의 유럽 정책은 고립주의가 아니라 선택적 개입 전략이다. 미국은 후퇴하지 않는다. 다만 동아시아에 집중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집중의 중심에는 패권 도전국인 중국이 있다.
유럽을 ‘관리 대상’에서 ‘활용 대상’으로 전환한 미국
과거의 미국은 유럽을 세계질서 유지의 공동 관리자이자 규범 파트너로 대했다. 그러나 오늘의 미국은 유럽을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려 한다. 강한 유럽을 원한다는 말은,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유럽을 원한다는 뜻이지, 독자적 권력을 가진 유럽을 허용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유럽은 미국의 전략적 실험장이 된다. 미국은 유럽 내부의 균열, 민족주의, 주권주의, 반EU 정서를 활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하는 방식과 닮아 있지만, 목적은 다르다. 러시아는 유럽을 약화시키려 하고, 미국은 유럽을 분절해서 관리하려 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미중 경쟁이 장기화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에 모든 자원을 투입하기 위해, 유럽이 스스로 방위 비용을 감당하고 정치적 통합의 속도를 늦추기를 원하고 있다. 트럼프의 대 유럽 전략은 이 같은 모든 계산의 결과다.
동아시아는 다음 순서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이 같은 변화는 동아시아에 대한 예고편에 가깝다. 미국은 이미 동아시아에서도 ‘선별적 동맹’이라는 접근을 강화하고 있다. 모든 동맹을 동일하게 대하지 않으며, 기여도와 전략적 가치에 따라 차등화한다.
이는 일본, 한국, 대만, 호주, 필리핀을 하나의 묶음으로 관리하던 과거 방식의 종언을 의미한다. 미국은 각 국가를 개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고 있으며, 동맹의 조건을 재설정하고 있다. 유럽에서 유럽연합이 겪는 운명은, 동아시아에서 ‘집단적 안보 구상’이 직면하게 될 현실과 맞닿아 있다.
한국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교훈
한국이 이 같은 변화를 통해 읽어야 할 첫 번째 교훈은, 동맹은 영구적 지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재협상되는 계약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더 이상 동맹을 도덕적 약속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비용 대비 효용의 문제다. 이 점을 외면하는 국가는 반드시 전략적 수동성에 빠진다.
두 번째 교훈은, 집단의 우산 아래 숨는 전략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럽연합이라는 거대한 구조조차 미국 앞에서 협상력이 약화되고 있다면, 동아시아에서 느슨한 다자 틀에 기대는 전략은 더욱 위험하다.
세 번째 교훈은, 이념적 공감대보다 실질적 기여 능력이 동맹의 핵심 기준이 되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가치, 규범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힘이 없는 가치 연대는 유지되지 않는다.
한국의 전략적 대응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대응 전략은 명확하다. 첫째, 한미동맹을 도덕적 신뢰가 아니라 전략적 자산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에게 ‘지켜줘야 할 동맹’이 아니라 ‘함께 쓰고 싶은 동맹’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은 미국과 역내 질서를 함께 관리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기술적, 산업적 기여 능력을 구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둘째, 한국은 스스로를 지역 안보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능동적 공급자로 전환해야 한다. 방위산업, 정보자산, 해양 통제, 미사일 방어, 우주·사이버 영역에서의 기여는 더 이상 부차적 요소가 아니다. 이것이 곧 협상력이다.
셋째, 한국은 동맹 안에서조차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동맹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동맹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이다. 유럽이 겪는 가장 큰 위기는, 미국의 전략 변화에 대응할 자율적 선택지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한국은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미중 경쟁의 시대, 한국 대전략의 핵심
미중 패권 경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이는 체제 경쟁이자 기술 경쟁이며, 동시에 질서 경쟁이다. 이 구조 속에서 미국은 동맹을 재편하고, 중국은 영향권을 확장하려 할 것이다. 중간 국가의 생존 전략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어려움은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유럽이 전략적 혼란에 빠진 지금, 동아시아는 새로운 질서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은 이 질서에서 주변부 국가로 남을 수도 있고,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준비의 문제다.
트럼프가 보여주고 있는 이 같은 대 유럽 인식은 한국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미국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설계하지 않는 국가는 설계를 당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