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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전쟁 없이 봉쇄하는 시대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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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전쟁 없이 봉쇄하는 시대의 개막

러시아 그림자 선단의 다섯 번째 유조선 나포가 드러낸 제재의 군사화와 바다로 이동한 패권 경쟁
美가 베네수엘라서 도주한 러시아 국적 유조선 벨라1호를 지난 1월7일 북대서양에서 나포한 지 이틀 뒤인 지난 1월9일 다섯번째 유조선인 올리나를 나포했다. 사진은 지난해 3월 18일(현지시각)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된 싱가포르 해협을 항해 중인 유조선 벨라 1호의 모습이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美가 베네수엘라서 도주한 러시아 국적 유조선 벨라1호를 지난 1월7일 북대서양에서 나포한 지 이틀 뒤인 지난 1월9일 다섯번째 유조선인 올리나를 나포했다. 사진은 지난해 3월 18일(현지시각)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된 싱가포르 해협을 항해 중인 유조선 벨라 1호의 모습이다. 사진=로이터

미국은 금요일 새벽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서 다섯 번째 유조선을 나포했다. 나포된 선박은 올리나로, 동티모르 국적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의 제재 회피 네트워크인 이른바 그림자 선단과 연관된 유조선으로 확인됐다. 이 선박은 과거 러시아 원유를 운송한 전력이 있으며, 최근에는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 터미널에서 원유를 선적한 직후 제지됐다. 미국 당국은 이 선박이 국적을 위장하고 위치 신호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회피해 왔다고 판단했다.

이번 나포는 단발성 조치가 아니다. 미국은 이미 네 척의 유조선을 연이어 나포했고, 다섯 번째 조치를 통해 제재 집행이 일회성 단속이 아니라 지속적인 해상 작전 단계에 진입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이 겨냥한 것은 개별 선박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의 상당 부분을 떠받쳐 온 제재 회피 수송망 전체다. 실제로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의 약 70퍼센트가 이러한 우회 운송 구조에 의존해 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융 제재와 외교 압박을 넘어 원유가 바다를 건너 이동하는 물리적 경로 자체를 차단하는 쪽으로 전략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올리나 나포가 보여준 제재 집행의 질적 변화


이 사건의 본질은 제재 방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냉전 이후 미국의 제재 전략은 달러 결제망과 보험, 항만 접근권, 국제 금융 시스템을 활용한 간접 압박에 기반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란, 베네수엘라가 구축한 그림자 선단은 이러한 제재 체계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왔다. 국적을 위장하고 위치 신호를 차단하며 제3국을 경유하는 방식은 제재 회피를 일시적 편법이 아니라 구조적 시스템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올리나 나포는 미국이 이 같은 현실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판단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피가 제도화됨에 따라 제재 역시 물리적 차단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시 등장한 개념이 해상 봉쇄다. 다만 이는 전통적인 전시 봉쇄와는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선전포고도 공식적인 봉쇄 선언도 하지 않고 있다. 대신 제재 위반이라는 법적 명분 아래 공해와 제3국 인근 해역에서 선박을 차단하고 나포한다. 상대국은 이를 전쟁 행위로 규정하기 어렵고 대응 수단도 제한된다. 저강도의 해상 봉쇄가 평시 제재 집행의 형태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략에서 베네수엘라는 명분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이 겨냥하고 있는 목표는 베네수엘라 한 나라의 원유가 아니라 러시아가 주도해 온 제재 회피형 해상 수송 생태계인 것이다. 올리나가 동티모르 국적을 달고 있었음에도 러시아 그림자 선단과의 연계가 문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적과 소유 구조, 운항 이력이 복잡하게 위장된 선박들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미국은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 통로 전반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해상에서 시작된 미러 충돌과 미중 전이의 위험


이번 조치가 긴장을 키운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의 대응 방식이다. 앞선 나포 사례에서는 러시아 해군이 제재 대상 유조선을 직접 호위했고, 군용 항공기가 제지 작전에 투입된 선박 상공을 비행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항공모함 전단과 특수부대, 공중 전력을 투입해 나포 작전을 지원했다. 제재 집행 과정에서 사실상 군사적 대치가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법 집행과 군사 작전의 경계가 바다 위에서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로 인해 미러 관계에는 새로운 불안 요소가 추가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긴장은 주로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관리돼 왔지만, 이제 해상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해상에서는 판단 시간이 짧고 오인의 가능성이 크다. 작은 마찰 하나가 의도치 않은 군사적 확전으로 이어질 위험을 배제하기 어렵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같은 장면을 중국 역시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제재를 이유로 공해와 제3국 인근에서 선박을 나포할 수 있다는 선례는 에너지 수송로에 의존하는 중국에게 직접적인 전략적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시 중국 선박과 에너지 수송망도 동일한 방식으로 차단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해상 수송 보호와 해군력 운용을 전략의 중심으로 더욱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다. 이는 남중국해와 인도양, 중동 항로 전반에서 군사적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세계 질서 차원에서 보면 올리나 나포 사건은 규칙 기반 질서에서 통제 기반 질서로의 이동을 상징한다. 규범과 합의가 중심이던 시기에는 분쟁이 규칙 위반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분쟁은 누가 바다를 통제하고 누가 물리적으로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중소국과 비동맹국의 해상 활동은 상시적인 불확실성에 노출되고 에너지 시장은 제재와 군사 작전이 결합된 구조적 불안정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

다섯 번째 유조선 나포는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의 경계가 바다 위에서 빠르게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좌인 것은 분명하다. 제재는 더 이상 문서 속의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유조선의 항로를 끊고 군사력이 배경에 선 채 집행되는 현실이 되었다. 신 해상 봉쇄 전략은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세계 질서의 작동 방식을 바꾸고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