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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HBM4E '전력망 혁명'… 결함 97% 차단하고 AI 반도체 판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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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HBM4E '전력망 혁명'… 결함 97% 차단하고 AI 반도체 판도 바꾼다

전력 범프 1만4457개로 확대·IR 드롭 41% 개선… HBM 시장 탈환 승부수
GPU와 5㎝ 이격 '광연결' 구조 검토… 열·전력 동시 해결로 차세대 AI칩 표준 주도
삼성전자 HBM4 제품 사진. 사진=삼성전자이미지 확대보기
삼성전자 HBM4 제품 사진. 사진=삼성전자
엔비디아의 차세대 '루빈(Rubin)' 가속기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삼성전자는 이미 그 다음 싸움을 시작했다. HBM4 양산이 채 궤도에 오르기 전, 차세대 제품인 HBM4E의 설계도를 통째로 다시 그리는 이례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선택의 배경에는 AI 가속기 시장을 관통하는 냉혹한 공식이 있다. 칩 성능은 결국 '전력'''을 누가 더 잘 다스리느냐로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HBM 시장 점유율 변화 및 전망 (2025~2027).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HBM 시장 점유율 변화 및 전망 (2025~2027). 도표=글로벌이코노믹


전력 블록 4분할·범프 775개 추가… 'IR 드롭'의 악순환 끊었다


테크파워업(TechPowerUp)3(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HBM4E 설계 단계에서 전력 공급망(PDN·Power Delivery Network)을 전면 재구성했다. 핵심 전략은 두 가지다. 기존에 하나의 덩어리로 운용하던 대규모 전력 블록을 4개의 독립 구역으로 세분화했고, 전력을 실어 나르는 통로인 '전력 범프' 수를 기존 13682개에서 14457개로 775개 늘렸다.

이 두 조치가 겨냥한 것은 반도체 미세화의 고질적 부작용인 'IR 드롭(Voltage Drop)' 현상이다. HBM4E처럼 배선이 극도로 조밀해지면 전류 밀도가 치솟고 저항이 함께 커져 전압이 설계 목표치 아래로 떨어진다. 전압 저하는 칩 오작동으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이 다시 저항을 끌어올리는 악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삼성전자의 재설계 결과는 수치로 명확히 증명됐다. 금속 회로 결함률이 이전 세대 대비 97% 급감했고, IR 드롭 현상은 41% 개선됐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전력망 설계 변경만으로 이 같은 성과를 달성한 사례가 드물다고 평가한다. 공정 미세화에 수조 원을 투입하는 대신, 설계의 구조적 변화로 물리적 한계를 정면 돌파한 셈이다.

5㎝ 이격·테라비트급 광연결… AI 칩 물리 구조의 근본적 전환


삼성전자의 구상은 전력망 재설계에 그치지 않는다. HBMGPU를 물리적으로 5㎝ 이상 떼어놓는 이른바 '탈밀집화(De-densification)' 구조도 검토 대상에 올라와 있다. 기존 반도체 패키징은 데이터 전송 지연을 최소화하기 위해 칩과 칩을 최대한 밀착 배치하는 것을 당연한 원칙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밀집 배치는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GPU가 내뿜는 열이 바로 옆 HBM에 직접 전달되면서 메모리 안정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 물리적 거리를 벌리는 대신 구리 배선보다 약 1000배 빠른 '광연결(Photonic Interconnect)' 기술로 속도 손실을 만회한다는 계획이다. 빛을 매개로 신호를 주고받는 광전송 방식을 활용하면 5㎝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도 테라비트(Tb)급 초고속 통신이 가능하다.

반도체 설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구상이 현실화될 경우 AI 칩의 물리적 설계 공식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열원(GPU)과 메모리를 분리해 냉각 효율을 극대화하는 구조는 기판 배선 기술의 고도화와 맞물려 차세대 AI 시스템의 새로운 기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삼성의 설계 혁신이 국내 반도체 산업에 주는 의미


이번 삼성전자의 행보는 단순한 사양 개선을 넘어선다. HBM 시장에서 한 발 뒤처진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열쇠는 공정 경쟁보다 '설계 경쟁력'에서 나올 수 있음을 이번 재설계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전력망 설계는 팹리스(설계 전문) 역량의 영역인 만큼, 삼성전자가 자체 파운드리 공정을 HBM 로직 다이에 적용하면서 설계와 공정을 동시에 최적화하는 수직 통합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전략이 안착한다면, 삼성전자는 향후 엔비디아·구글·아마존 등 주요 고객사가 요구하는 맞춤형(Custom) HBM 시장에서도 강력한 협상 카드를 쥐게 된다.

전력 공급망 최적화로 확보한 '전압 여유분(Voltage Headroom)'은 칩이 한층 높은 작동 속도에서도 안정적으로 구동될 수 있는 설계 여백이다. 이는 AI 연산 부하가 갈수록 극대화되는 환경에서 고객사가 가장 민감하게 따지는 항목이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결함률 97% 감소·전압 개선 41%라는 정량 성과를 손에 쥔 채 HBM4E 양산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시장 점유율 반등의 현실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2026~2027 HBM 시장, 폭풍 성장 속 3강 구도 재편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HBM 수요는 2026년 전년 대비 77%, 202768% 추가 성장할 전망이다. 특히 2027년에는 HBM4E가 전체 HBM 수요의 약 40%를 차지하는 주력 세대로 부상할 것으로 예측됐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2026HBM 시장 규모를 약 546억 달러(807800억 원)로 추산하며, 이를 1990년대 반도체 호황에 버금가는 '슈퍼사이클'로 규정했다.

현재 시장 구도는 SK하이닉스가 20253분기 기준 53%의 점유율로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삼성전자(35%)가 뒤를 쫓고 마이크론(11%)이 세 번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카운터포인트 리서치). 2025년 상반기만 해도 17%까지 밀렸던 삼성전자는 HBM3E 고객사 인증과 HBM4 공급 본격화에 힘입어 점유율을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투자은행 UBS는 엔비디아 루빈 플랫폼용 HBM4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약 70%를 공급할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전자는 생산능력을 2026년 말까지 약 50% 확대해 30% 이상의 점유율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국내 업계에는 알려져 있다. HBM4E 개발을 2026년 상반기 완료 목표로 제시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027년 양산 경쟁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가 향후 시장 판도를 결정할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전력이 곧 성능인 시대… 설계 혁신이 새 표준을 쓴다


HBM4E를 둘러싼 삼성전자의 승부수는 기술이 아닌 전략적 선택의 문제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국가 단위 에너지 정책의 변수로 떠오른 지금, 반도체 한 장이 소비하는 전력과 그것이 발산하는 열은 단순한 성능 지표를 넘어 산업 전체의 경쟁 방정식을 좌우하는 변수가 됐다.

삼성전자가 이번에 구현한 전력망 분할 설계와 광연결 기술의 결합이 현실화된다면, AI 메모리 분야의 게임판 자체가 달라진다. 반도체 공정의 미세화가 물리적 한계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어떻게 만드느냐'보다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더 결정적인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삼성전자의 HBM4E 설계 혁신은 그 전환점에서 던지는 첫 번째 선언에 다름 아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