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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꿈의 원소'… 빌 게이츠, 폐정유소 터에 4억 5000만 달러 베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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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꿈의 원소'… 빌 게이츠, 폐정유소 터에 4억 5000만 달러 베팅

테라파워, 필라델피아에 전 세계 최대 규모 액티늄-225 생산기지 건설 확정
한국 바이오·제약업계, 원료 공급망 다변화 기회 열리나
빌 게이츠가 설립·지원하는 차세대 원자력 기업 테라파워(TerraPower)가 액티늄-225 원소의 안정적 공급망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에 6000억 원대 생산 거점을 세운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빌 게이츠가 설립·지원하는 차세대 원자력 기업 테라파워(TerraPower)가 액티늄-225 원소의 안정적 공급망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에 6000억 원대 생산 거점을 세운다.. 사진=연합뉴스
암 환자에게 항암제는 언제나 ''이었다. 암세포를 공격하는 동안 멀쩡한 정상 세포도 함께 망가지는 것이 20세기 표준 치료의 한계였다. 그 패러다임을 뒤집을 핵심 열쇠로 최근 방사성 의학계가 주목하는 원소가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희귀한 물질 중 하나인 '액티늄-225(Actinium-225·Ac-225)'. 빌 게이츠가 설립·지원하는 차세대 원자력 기업 테라파워(TerraPower)가 이 원소의 안정적 공급망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에 6000억 원대 생산 거점을 세운다.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 필라델피아 암 치료제 공장 건설 현황.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 필라델피아 암 치료제 공장 건설 현황. 도표=글로벌이코노믹


폐정유소가 항암 심장부로… 역사적 부지 전환


NBC 필라델피아는 지난 17(현지시각) 테라파워의 자회사 '테라파워 아이소토피스(TerraPower Isotopes)'가 필라델피아 남서부 벨웨더(Bellwether) 지구에 45000만 달러(한화 약 6740억 원)를 투입해 동위원소 전문 제조시설을 건립한다고 보도했다. 조쉬 샤피로(Josh Shapiro) 펜실베이니아 주지사가 공식 발표에 나선 이 부지는 2019년 대형 화재 이후 가동이 중단된 '필라델피아 에너지 솔루션(PES)' 정유공장 자리다. 산업 쇠퇴의 상징이던 약 232000(7만 평) 규모의 황량한 터가 정밀의학 혁신의 심장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입지 선정이 단순하지 않았다. 테라파워 아이소토피스 측은 전 세계 350여 곳의 후보지를 검토한 끝에 필라델피아를 낙점했다. 항만·철도 등 물류 인프라, 드렉셀(Drexel)·펜실베이니아(UPenn) 등 인접 연구중심 대학, 기존 생명과학 클러스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릭 사이거(Rick Siger) 펜실베이니아 지역사회경제개발부 장관은 "이번 투자는 수백 개의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면서 동시에 주() 전체의 생명과학 생태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이중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액티늄-225'인가… 공급 절벽이 부른 6740억 원 베팅


액티늄-225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타격하는 '표적 방사성 의약품(Targeted Radionuclide Therapy)' 제조의 핵심 원료다. 기존 항암 방사선 치료가 정상 조직까지 광범위하게 손상하는 것과 달리, 이 원소를 탑재한 의약품은 암세포 표면의 특정 단백질을 인식해 방사선을 근거리에서 쏘아붙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문제는 공급이다. 현재 전 세계 액티늄-225 생산량은 연간 수백 밀리큐리(mCi) 수준에 불과하며, 상당 부분은 러시아와 유럽의 연구용 원자로에 의존한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이 원소를 활용한 차세대 항암제 임상을 경쟁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원료 부족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스콧 클런치(Scott Clunch) 테라파워 아이소토피스 사장은 NBC 필라델피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설은 암 치료의 방식 자체를 바꿔가고 있는 성장 산업에서 액티늄-225의 막대한 수요를 충족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며 "정밀의학의 미래를 여는 결정적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원자력 기술의 '의료 전환'… 빌 게이츠 구상의 진화

테라파워는 빌 게이츠가 2006년 설립한 회사로, 나트리움(Natrium) 소형 원자로 프로젝트 등 차세대 원전 기술 개발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는 에너지 생산이 아닌 의료용 동위원소 생산에 방점을 찍었다. 고에너지 입자를 정밀하게 제어해 특정 원소를 생산하는 가속기(Accelerator) 및 원자로 기반 핵반응 기술이 의학 분야에 직접 응용된 사례다.

방사성 의약품 전문가들은 이번 투자를 원자력과 바이오의 산업 경계가 본격적으로 허물어지는 신호탄으로 본다. 업계 관계자는 "테라파워가 의약품 원료 공급사로 자리 잡으면, 노바티스(Novartis)·일라이 릴리(Eli Lilly) 등 이미 표적 방사성 의약품 임상에 진입한 빅파마들과의 장기 공급 계약 협상에서 막강한 협상력을 보유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한국 제약·바이오업계, '공급망 다변화'의 기회 주목해야


국내 시각에서 이 소식은 단순 외신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동화약품·듀켐바이오·한국원자력의학원 등은 방사성 의약품 분야에 진출해 있거나 관련 기술을 개발 중이다. 그러나 국내 방사성 의약품 업계의 아킬레스건은 원료의 해외 의존이다. 테라파워가 본격 가동에 들어가면 러시아·캐나다 등에 편중된 액티늄-225 공급망에 미국발 새로운 선택지가 추가되는 셈이다.

방사성의약품 시장조사업체들은 전 세계 표적 방사성 의약품 시장 규모가 2030년까지 연평균 20%대의 폭발적 성장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 제약 업계 관계자는 "대형 공급처가 생기면 원료 수급 안정성이 높아져, 임상 속도와 상업화 일정 예측 가능성이 함께 개선된다"고 말했다.

게이츠 재단은 오랫동안 감염병과 함께 암을 인류의 핵심 위협으로 지목해왔다. 빌 게이츠가 필라델피아의 폐정유소 터에 6740억 원을 쏟아붓는 이유는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다. 액티늄-225라는 희귀 원소를 매개로, 원자력과 제약의 경계를 지운 새로운 산업 권력 지도를 다시 그리겠다는 선언이다. 그 지형 변화가 서울의 바이오 기업들에게도 기회인지 위협인지, 국내 업계의 선제적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