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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스타인 스캔들’에 얼룩진 빌 게이츠의 ‘기부 약속’… 실리콘밸리 거물들 잇따라 탈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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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스타인 스캔들’에 얼룩진 빌 게이츠의 ‘기부 약속’… 실리콘밸리 거물들 잇따라 탈퇴

피터 틸 “엡스타인 연루된 가짜 부머 클럽” 맹비난… 머스크 등에 ‘손절’ 권고
코인베이스 암스트롱 등 테크 억만장자 이탈 가속… 기부의 ‘정치적 편향성’ 도마 위
오라클 엘리슨, 자선 대신 ‘영리 연구’ 선회… 구속력 없는 ‘빈 수레’ 비판에 직면
빌 게이츠가 주도해온 기빙 플레지에서 주요 억만장자들이 잇따라 이탈하거나 기부 방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빌 게이츠가 주도해온 기빙 플레지에서 주요 억만장자들이 잇따라 이탈하거나 기부 방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연합뉴스
세계 최대의 자선 서약 캠페인인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가 설립자인 빌 게이츠의 도덕성 논란과 정치적 편향성 비판에 직면하며 창립 16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뉴욕포스트(New York Post)는 지난 16일(현지시각) 보도를 통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가 주도해온 기빙 플레지에서 주요 억만장자들이 잇따라 이탈하거나 기부 방식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는 게이츠가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맺어온 긴밀한 관계가 재차 부각되고, 기금 운영이 특정 정치색을 띤다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촉발된 것으로 풀이된다.

‘엡스타인 리스크’에 갇힌 기부 서약… 테크 거물들 “부머 클럽” 조롱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투자자 피터 틸(Peter Thiel)은 기빙 플레지를 향해 “엡스타인과 인접한 가짜 베이비부머 클럽”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틸은 최근 연설에서 일론 머스크(Elon Musk)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동료 억만장자들에게 이 서약을 파기하라고 개인적으로 종용했다.

틸은 특히 “서약에 동참한 자금이 결국 빌 게이츠가 낙점한 좌파 성향 비영리 단체의 배만 불리게 될 것”이라고 정조준했다.

실제로 마크 안드레센 등 벤처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현대적 자선 활동이 기후 변화, 다양성 프로그램 등 특정 진보적 의제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불만이 팽배하다.

빌 게이츠를 향한 도덕적 지탄도 뼈아픈 대목이다. 게이츠는 과거 엡스타인을 통해 만난 러시아 여성들과 외도한 사실을 최근 시인한 바 있다. 엡스타인은 2019년 수감 중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인물로, 게이츠와 멀린다 프렌치 게이츠의 파경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인베이스 대표 ‘조용히 탈퇴’… 자선 대신 ‘영리 투자’ 선회하는 부호들

기부 약속을 공식 철회하거나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브라이언 암스트롱(Brian Armstrong) 코인베이스 창업자는 2019년 서약에 동참했으나, 지난해 기빙 플레지 웹사이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하며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초기 가입자인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오라클 공동 창업자 역시 기류 변화를 예고했다. 엘리슨은 지난해 “기부 서약 내용을 수정해 전통적 자선보다는 영리 목적의 연구 벤처 투자에 더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무조건적인 시혜보다 기술 혁신을 통한 사회 기여를 우선시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업계 안팎에서는 기빙 플레지의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 서약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신사협정’에 불과하며, 서약자가 실제 얼마를 기부했는지 추적하는 장치도 전무하다.

많은 부호가 약속한 자산을 즉각 기여하는 대신 개인 재단이나 기부자 조언 기금(DAF)에 묶어두고 세제 혜택만 누린 채 실제 집행은 미루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착한 부자’ 프레임의 붕괴… 한국형 기부 모델에 던지는 함의


이번 사태는 단순한 가십을 넘어 억만장자들의 기부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과거 부호들이 평판 개선을 위해 자선에 매달리던 ‘평판 세탁’의 시대가 저물고, 기부자의 가치관이 직접적으로 투영되는 실용적 투자형 기부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SK그룹의 사회적 가치(SV) 창출이나 삼성의 사회공헌 활동 등 기업 중심의 기부 문화가 정착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자산가들의 직접적인 '임팩트 투자' 선호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국내 대형 로펌의 자선 재단 자문 변호사는 "기빙 플레지의 위기는 기부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담보하지 못할 때 대중은 물론 기부자 자신에게도 외면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한국의 자산가들 역시 단순한 명예 중심 서약보다는 구체적인 사회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 맞춤형 기부를 선호하는 추세"라고 귀띔했다.

빌 게이츠의 개인적 평판 하락은 글로벌 기부 문화에 ‘탈중앙화’와 ‘실용주의’라는 숙제를 안겼다. 기빙 플레지가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면 투명한 사후 관리 시스템 도입과 정치적 중립성 확보라는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