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달러 한 달 새 3% 급등…中東 전쟁이 바꾼 글로벌 외환 지형

글로벌이코노믹

달러 한 달 새 3% 급등…中東 전쟁이 바꾼 글로벌 외환 지형

호르무즈 봉쇄로 유럽·日 에너지 취약성 노출…달러 패권 재확인
연준 금리 인하 기대 사실상 소멸…월가, 달러 전망 놓고 엇갈린 시각
블룸버그 달러 지수가 이달 들어  지난 2022년 9월 이후 최대 월간 상승폭인 약 3% 올랐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블룸버그 달러 지수가 이달 들어 지난 2022년 9월 이후 최대 월간 상승폭인 약 3% 올랐다. 사진=연합뉴스


원·달러 환율이 17년 만에 처음으로 1500원 선을 돌파하던 그 시각, 달러는 전 세계 외환시장에서 조용히 2022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몸값을 불리고 있었다.

중동 전쟁이라는 단일 사건이 에너지 시장을 뒤흔들고, 세계 경제성장 전망을 끌어내리고,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지위를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데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블룸버그 달러 지수가 이달 들어 약 3% 올랐다고 보도했다. 지난 2022년 9월 이후 최대 월간 상승폭이다. 안전자산 선호 수요가 강하게 유입된 데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미국의 에너지 지위가 이번 위기 국면에서 달러 가치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됐다.
씨아이비씨 캐피털마켓(CIBC Capital Markets)의 노아 버팜 전략가는 "세계 성장 기대가 꺾이면서 달러가 안전자산으로서의 매력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호르무즈 봉쇄, 외환시장 판도를 뒤집다


이번 달러 급등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지난 2월 28일(현지시각) 미국·이스라엘 연합군의 이란 공격, 그리고 그 직후 단행된 호르무즈 해협 봉쇄 선언이다.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이 해협이 막히자 유조선 통행량이 70% 넘게 줄었고, 150척 이상이 해협 밖에서 발이 묶였다.

브렌트유는 지난달 27일 배럴당 72.5달러에서 지난 25일 99.2달러로, 한 달도 채 안 돼 41% 치솟았다. 최근 몇 주간 등락을 거듭한 끝에 국제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넘어섰다.

유가 급등이 외환시장에 미친 파장은 미국보다 유럽과 일본에 훨씬 크게 작용했다. 두 지역 모두 중동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해협 봉쇄 충격을 정면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전쟁 전까지 달러 약세에 베팅하던 투자자들은 급히 포지션을 청산했고, 달러 강세 베팅 규모는 파생상품 시장에서 70억 달러(약 10조 5500억 원)를 넘어 지난해 12월 이후 최대치에 올랐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외환 전략가 오드리 차일드-프리먼과 틴 응우옌은 "이란 전쟁 개전 이후 달러의 안전자산 기능이 살아났다"면서도 "미국의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적 태도가 통화 분산 전략의 논거를 키우고 있어 달러 가격 움직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연준 금리 인하 기대 사실상 소멸…한국엔 '이중고’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축은 연방준비제도(연준) 금리 인하 기대의 급격한 후퇴다. 에너지 가격 급등이 물가를 다시 자극하면서 시장 참가자들이 올해 통화 완화 시나리오를 잇따라 거둬들이고 있다.

JP모건 전략가들은 연말까지 단 한 차례 0.25%포인트 인하를 기본 시나리오로 유지하고 있으며, 시장 일각에서는 올해 금리 인하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열어두기 시작했다.

전쟁 전 달러 약세를 점쳤던 JP모건과 골드만삭스도 달러 전망 재검토에 들어갔다. 다만 지정학적 뉴스 흐름과 글로벌 위험 심리가 날마다 요동치는 상황이라 전망 수정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게 월가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 충격파는 한국 경제를 압박하는 '이중고'로 이어졌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23일 1517원까지 치솟아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달러 강세가 에너지 수입 비용과 환율 부담을 동시에 키우는 구조다.

여기에 중동 전쟁의 파장은 반도체 공급망까지 뻗어 나가고 있다. 이란의 공격으로 카타르 액화천연가스(LNG) 시설이 타격을 입으면서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수적인 헬륨 공급이 사실상 중단됐으며, 공급 차질이 4~8주 이상 이어질 경우 첨단 반도체 생산에도 제약이 생길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달 반도체 수출이 전년 대비 163.9% 급증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한 한국입장에서는 수출 호재와 공급망 위협이 동시에 맞닥뜨린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월가 '달러 추격 매수 자제'…구조적 이탈 논쟁 재점화


매뉴라이프 투자 운용의 선임 포트폴리오 매니저 네이선 투프트는 "지정학적 위험과 물가 재상승 우려가 안전 자산 선호를 강화하고 미국의 금리 우위를 지지했다"면서도 "단기 안전 자산 프리미엄은 이미 상당 부분 가격에 반영된 만큼 지금 시점에서 달러 랠리를 추격하기보다 되돌림을 대비하는 전략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달러 강세가 장기화할지에 대한 구조적 의문도 불거지고 있다. 글로벌 운용사 인베스코(Invesco)와 영국 바클리즈(Barclays) 등은 이번 전쟁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변동성과 맞물려 미국 자산과 달러화로부터의 장기 이탈 논의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우려를 거두지 않고 있다.

옵션 시장에서 향후 한 달 내 달러 강세 베팅이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구간에서는 강세 기대가 점차 희미해지는 포지셔닝이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봉쇄 해제 최후통첩 시한을 오는 6일로 재차 연기했으나, 이란이 우라늄 농축 금지, 미사일 능력 제한 등 15개 항목의 정전 조건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이달 30일 보고서에서 호르무즈 해협 통제가 장기화할 경우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장기간 웃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달러가 전쟁이라는 시험대 위에서 다시 한번 기축통화 지위를 확인했지만, 그 강세가 중동 사태 진정과 함께 얼마나 빠르게 식을지는 오는 6일 이란 협상 결과가 첫 번째 갈림길이 될 전망이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