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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건축이야기(8)] 철이 만든 '아트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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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건축이야기(8)] 철이 만든 '아트 스페이스'

철강공장과 조선소가 떠나면서 슬럼가로 변한 이 지역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스위스의 '취리히 웨스트'.이미지 확대보기
철강공장과 조선소가 떠나면서 슬럼가로 변한 이 지역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탈바꿈시킨 스위스의 '취리히 웨스트'.
# 철은 윤회한다. 변신도 곧잘 한다. 그러나 육중한 철 구조물은 해체가 어렵다. 비용도 많이 든다. 이럴 때 철 구조물은 통째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1998년 동국제강이 부산 용호동에 소재한 부산제강소를 포항으로 이전할 때의 일이다. 최고경영층은 20만여 평의 철강공장 부지 활용 방안을 찾느라 2년여 동안 골몰했다. 대규모 공장건물의 재활용이 탁상 위로 부상했다가 사라지길 여러 차례 거쳤다.

아까운 건물의 재활용 방안은 없는가?

부산 시민들이 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업종 전환은 없는가?

미국 디즈니랜드와 같은 공간을 만들 수는 없는가?
많은 아이디어들은 부산시 당국이 내민 법규 때문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공장지역이었던 부지가 주거지역으로 변경됐으므로 공장 신개축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법령이 문제였다. 부산시민들에게 연간 1조 원 이상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이 땅에서 생산 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법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모한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부산 시민들은 동국제강 부산제강소의 포항 이전을 안타까워한다.

동국제강 故장상태 회장은 1998년 공장을 폐쇄하면서 “땅은 필요한 사람에게 맡겼다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운영자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용호동 벌판에 남겨 두고 공장 부지를 포항으로 이전해야만 했다.

# 유럽은 다르다. 과거의 건물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그림 같은 마을. 유럽의 자그마한 산골 마을, 인구 40만 내외의 작은 도시 스위스 취리히 웨스트는 각종 조사 데이터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어둠의 그림자’였던 취리히 웨스트의 변신은 세계적인 모델로 주목 받는다. 20세기 말경부터 제철공장과 조선소가 하나 둘씩 이탈했다. 도시는 슬럼가로 변해갔다. 그 상태로 30여 년 동안 방치됐다.

취리히 시 당국은 도시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았다. 시 당국은 과거를 현대로 이어갔다. 과거의 건물을 활용하여 문화예술과 상업 지구로 하나하나 변신시켰다. 철의 변신이 시작된 것이다.

# 버려진 조선소(1860년 건설)와 제철공장에 극장, 레스토랑, 바, 쇼핑센터, 전시 공간을 유치했다. 폐선된 철로 아래 교각은 다채로운 매장과 클럽을 조성했다. 어찌 보면 손쉬운 일 같아 보인다.

스위스인들은 명품시계를 만들 듯, 도시 재개발도 장인정신이 깃든 느림의 미학으로 바꿔 나갔다. 오래지 않아 조성된 도시재건은 대성공이었다. 세계 굴지의 금융기업과 보험회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150여개에 달하는 미술관과 전시장, 그리고 공연장이 들어섰다.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고급 백화점에는 고가품에서부터 저렴한 상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게 됐다. 사람이 몰려드는 곳에 돈이 흐르는 법이니까. 지금의 ‘취리히 웨스트’는 혼잡하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일하고,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했다. 하늘을 찌르는 초고층 건물도 없고, 화려한 랜드마크가 없어도 스위스 사람들은 ‘취리히 웨스트’를 작은 뉴욕, 작은 파리, 작은 런던이라고 부른다.

‘취리히 웨스트’에 있던 제철공장과 조선소를 어떻게 했기에 가장 잘 사는 도시라는 명성을 얻은 것인가.

# 취리히 웨스트를 문화공간으로 바꾼 첨병은 ‘시프바우’이다. 말뜻 그대로 선박을 건조하던 조선소 건물이다. 건축가 피터케른이 지은(1860년) 지 100년이 넘은 거대한 조선소 건물 원형을 재즈 공연장, 극장, 레스토랑, 바 등을 갖춘 복합 문화공간으로 리노베이션 했다.

옛 조선소의 낡은 철문을 밀고 실내에 들어서면 과거로의 흥미진진한 여행이 시작된다. 콘크리트 벽과 녹슨 철골, 배관 파이프 등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천장과 창 사이로 스며드는 강렬한 햇빛과 은은한 실내조명은 옛날 조선소의 시설들을 아름답게 연출 시킨다.

‘시프바우’에서는 실험극장 ‘샤우슈필하우스’를 만날 수 있다. 독일어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극장이다. 규모면에서도 스위스 최대이다. 최고 수준의 공연을 옛 조선소 건물 안에서 감상하는 멋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은 ‘시프바우’에 자리잡은 ‘라 살’ 레스토랑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드레스 코드를 갖춰 입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이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연인과 함께, 또는 가족과 우아한 추억도 만들 수 있다.

‘시프바우’의 중앙에 자리 잡은 재즈 클럽 ‘더 무드’는 또 다른 매력을 갖춘 곳이다. 찌든 기름때와 검붉은 녹이 묻어나는 조선소 건물에서 감상하는 재즈의 선율은 어떨지 한번쯤 가고 싶어진다.

# 취리히 웨스트 유일의 거대한 현대식 건물은 ‘풀스5’(Puls5)이다. 제철소(1898년 건립) 건물 외관을 현대식으로 바꿨다. 이곳에 쇼핑센터, 전시 공간, 레스토랑 등이 들어와 있다.

건물 내부는 제철공장의 설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벽체에 드러난 철 구조물, 천정크레인이 오가던 빔의 낡은 모습, 용광로, 거대한 수조 파이프 등 쉽게 볼 수 없는 설비들이 입점한 상점들과 어울려 미적 감각을 더한다. 100년 넘은 버려진 제철소 공장은 이렇게 ‘사랑받는 공간으로 변신’했다.

‘비아둑트’(Viadukt)와 ‘프라이탁’(Freitag)은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공간이며, ‘풀스 5’ 옆의 철로교각 아래에 나란히 자리 잡은 50여개의 상가에는 다채로운 매장과 젊은이들을 위한 클럽으로 유명한 곳이 됐다.

# 바다와 인접한 철강공장을 쓸어내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부산 용호동. 수백만평에 달하는 제철소를 환경공원으로 바꾸어 연인원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드나들게 한 독일 ‘뒤스부르크’. 문화 예술 공간을 유치시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탈바꿈 시킨 스위스 ‘취리히 웨스트’. 세 나라의 도시 행정가들이 선택한 결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철은 제조업의 핵심을 넘어 문화예술의 안식처도 만들어 준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꼬집어본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