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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4)] 한 가족의 열정이 세운 ‘브루클린 다리’의 건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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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4)] 한 가족의 열정이 세운 ‘브루클린 다리’의 건설스토리

브루클린 다리는 존 로블링과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 그리고 며느리 에밀리가 참가해 완성시킨 다리이다. 에밀리는 준공식 날, 승리의 상징인 수탉을 안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브루클린 다리는 존 로블링과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 그리고 며느리 에밀리가 참가해 완성시킨 다리이다. 에밀리는 준공식 날, 승리의 상징인 수탉을 안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사진=로이터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를 팔아먹은 남자가 있다. ‘폴 하투니언’이란 사람이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무릎을 쳤다. 그리고 곧장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한 다리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 낡은 목재를 내게 팔 수 없겠소?”

“얼마든지 가져가시오.”

다리의 낡은 목재 도리를 제거하던 현장 소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사실 처치 곤란이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하투니언’은 낡은 목재를 가로 세로 2.5㎝ 크기에 3㎜ 두께로 잘랐다. ‘이 증서를 가진 사람은 브루클린 다리 또는 일부를 매입했음을 증명한다.’ 이 글을 나무 조각에 부착했다. 그리고 북미 전역의 2000여개 언론사에 팩스를 보냈다.
“얼마 전에 ‘브루클린 다리’를 매입한 사람입니다. 원하는 사람에게 그 일부를 팔겠습니다.” 이후로 ‘하투니언’의 전화통은 불이 났다. 수백 군데의 언론매체는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 다투어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는 수천 개의 나무 조각 1개에 14달러 95센트씩 팔아 부를 거머쥐었다. 뉴욕 ‘브루클린 다리’에 얽힌 이야기이다. 황당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에 질려 버린다.

철강재로 만든 뉴욕 최초의 ‘브루클린 다리’는 1869년에 착공하여 1883년 개통됐다. 공사 기간만 15년이 걸렸다. 길이는 1053m. 개통되자 세계 최장의 다리로 주목을 받았다. 고딕형식의 탑과 강철 와이어 그물로 구성된 아름다움 때문에 영화와 예술 작품의 배경으로 곧잘 등장한다.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뜨거운 오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킹콩> 등이다.

에드카 뉴욕시장 시절에는 이 다리에 인파가 넘쳤다. 버스와 지하철 노조가 총파업을 시작하자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브루클린 다리’로 걸어서 통근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 다리의 보행도로는 차량도로보다 높다. 다리가 놓인 장소도 한가로운 곳에 있다. 다리의 타워는 그 당시, 가장 높은 빌딩보다 더 높았다. 이스트강(East River)을 오르내리는 수송선의 돛대보다 더 높아야 했기 때문이다.

‘브루클린 다리’는 걷는 사람과 마차, 전차와 소떼를 위해 설계됐다. 132년이 지난 이 다리는 왕복 6차선 도로 위를 하루 15만 대의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철강재의 효용성과 철을 다루는 엔지니어의 위대한 기술력이 빛을 발하는 현장이다. ‘브루클린 다리’의 건설스토리 속에는 한 가족의 대를 잇는 열정이 전해진다. 이 다리를 건설한 사람은 존 뢰블링(John A Roebling)과 그의 아들 워싱턴 뢰블링(Washington A Roebling)이다.

존 뢰블링은 독일계 이민자이다. 그는 교량 설계와 와이어-밧줄제조 공장운영자였다. 뢰블링은 어느 날 브루클린행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배가 얼음에 갇히는 사고를 당하면서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다리의 건설을 구상한다.

“언제든지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자.” 존 뢰블링은 설계안을 들고 뉴욕시와 브루클린시에 다리 구상을 제안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다만,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잇는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까지도 다리 건설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다리를 당장 건설해야 한다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은 강추위가 세차게 몰려왔다. 이스트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교통은 4주 동안 완전 두절됐다. 그러자 존 뢰블링이 제시한 다리의 설계안이 슬며시 부각되었다. 존 뢰블링은 사업가이자 언론사 사주인 윌리암 킹슬리를 찾아갔다. 킹슬리는 그의 비전에 적극 동의했다. 킹슬리는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랜 설득작업 끝에 브루클린 다리 건설의 실마리가 잡혔다.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1869년에 착공해 1883년에 개통한 뉴욕 최초의 철강재로 만든 브루클린 다리.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1869년에 착공해 1883년에 개통한 뉴욕 최초의 철강재로 만든 브루클린 다리. 사진=로이터

그 기업은 뉴욕교량건설회사(New York Bridge Company)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존 뢰블링은 측량 중에 뱃전에 발이 끼어 파상풍에 걸리게 된다. 그는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했지만 곧 숨을 거둔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존 뢰블링은 서른두 살의 아들 워싱턴 뢰블링을 불러 공사를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 아들은 흔쾌히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브루클린 다리 건설 총책임자로 나섰다.

그러나 건설 막바지쯤에 워싱턴 뢰블링도 병을 얻었다. 타워의 기초를 구축하는 지하공간에서 일하다 케이산병(Caisson disease)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화재와 폭발 등으로 스무 명의 인부가 사망하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게 된다. 워싱턴 뢰블링은 마비 증상 때문에 브루클린의 자택에서 망원경으로 현장을 점검하고 공사를 지휘했다. 실제로 엔지니어와 인부를 감독하고, 현장을 누빈 사람은 그의 부인 에밀리였다. 드디어 브루클린 다리는 완성되고, 개통식에 참석한 에밀리는 승리의 상징인 수탉을 안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넌다.

언론은 그녀의 가슴에 안긴 수탉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정작 참석해야 할 워싱턴 뢰블링은 개통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냥 다리 개통이라고 하면 될 것을….” 워싱턴 뢰블링의 독백은 담담했다. 브루클린 다리를 비롯한 뉴욕의 다리들은 문학과 예술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스위스 출신의 오스마 암만이 건설한 조지 워싱턴 다리는 권력자들의 압력을 뿌리치고 다리 건설에만 충실해서 유명세를 얻은 다리이다. 그는 공기를 6개월이나 줄이면서 터무니없는 공사비용을 보란 듯이 대폭 줄였다.

암만의 청렴과 성실성은 당시 뉴욕 항만청장이었던 로버트 모시스에게 인정받아 뉴욕의 교량과 터널공사를 연이어 맡게 된다. 퀸스보로 다리는 어마어마한 철 구조물이면서도 실용적인 느낌보다는 마치 중세의 고딕 건축과 같은 고전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 다리는 ‘위대한 게츠비’에 등장한다.

“퀸스보로 다리를 건너갈 때, 도시의 풍경은 언제나 맨 처음 조우할 때의 느낌을 준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미스터리와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노라는 약속인 양.” ‘퀸스보로 다리’ 하부 공간에는 고급 식품점인 푸드 엠포리엄(Food Emporium) 브릿지 마켓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과일과 채소 등이 풍성하게 진열되어 있다. 아름다운 타일과 높은 ‘볼트’구조로 인해 주부들에게 색다른 장보기 맛을 느끼게 한다.

바르셀로나 출신의 건축가 구스타비노가 고향 카탈루냐 지방의 볼트 축조 양식을 도입하여 설계한 아름다운 공간이다. 지금도 강쪽으로는 프라이빗 파티 전용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있고, 횡단보도와 가까운 쪽은 슈퍼마켓으로 개발되어 다리가 지역 주민의 생활공간으로 편입되었다.

철강재는 이렇게 건축가의 예술적 감각과 엔지니어의 집념과 도전의식이 어우러져 새로운 일상 공간을 창출해 낸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