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중국을 깔보고, 서구 열강은 중국내에 설치될 철도 건설과 경영권을 놓고 치열한 먹이 사냥에 정신이 없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헤이룽, 지린 등 두 성까지 연결한 후 지선을 다롄(大連)으로 확장했고, 영국은 광저우에서 주룽까지를 포함한 5개 철도 구간의 수축권을 요구하던 시기였다.
프랑스도 베트남에서 월남까지, 일본은 랴오성 신민에서 선양을 거쳐 단둥까지 철도권을 장악했다. 너나 없이 철도 건설에 광분했다. “부자가 되려면 철도를 깔아라. 기관차의 기적 소리 한 번에 황금 만 냥”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중국 조정의 권신들도 철도가 국민 경제에 미치는 중요성을 깨달았지만 권좌를 찬탈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과 스스로 철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민족 철도 건설이 본격화 된 것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철로대신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위안은 서태후에게 베이징에서 장자커우까지 징장철도 건설을 건의하고 재가를 얻었다. 장자커우는 역사적인 변혁기마다 군사 전략가들이 주목했던 요충지였으며, 네이멍구로 통하는 상업의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
철로건설이 가시화 되자 외국기업들은 먹이 사냥에 혈안이 되었다. 급기야 영국과 러시아간에 철도건설 수주경쟁이 벌어졌다. 당연히 중국인들의 반대는 격렬했다. 그러자 외국인들은 으름장을 놓았다
“중국인 엔지니어가 설계, 시공을 담당한다면 손을 떼겠다.” 중국 스스로는 철도건설을 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관비 아동 유학생 출신의 잔텐유(중국 철도의 아버지)를 전격 발탁했다.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해 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배짱을 보였다.” 그러자 영국의 일간지들은 잔텐유를 폄하했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탄생했다” “중국이 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철도를 건설하려면 적어도 50년은 지나야 한다.” 중국인을 조롱한 이 기사는 중국인들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잔텐유는 중국인의 자존심을 살렸다. 그는 몰락한 광둥차 상인의 후예였다. 1872년 열한 살 때 제1차 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6년간 기초 교육을 받은 후 예일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해 철로공정을 전공했다.
그는 체력이 뛰어났고 모든 운동에 발군이었다. 그가 야구시합에서 때린 홈런은 중국인이 해외에서 친 첫 번째 홈런이었다. 1881년 정부가 유학생 120명을 강제 귀국시킬 때 잔은 학사학위를 받은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귀국 초기에 유학에서 소환된 학생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과거 출신이 아니면 가는 곳마다 사람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일자리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양무파(洋務派)마저 서양인 기술자를 더 선호했다. 잔은 친구의 주선으로 겨우 철로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서양인의 조수 노릇을 하며 온갖 잡일을 다 했다. 힘들고 귀찮은 일은 잔의 몫이었다. 그러나 텐진~탕산간 철도를 80일 만에 완성하고, 징선철도(베이징~선양) 건설 과정에서 외국 회사들이 번번이 실패한 ‘롼어’ 철교건설도 잠수부들을 동원하여 간단히 해결했다. 중국의 전통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공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잔이 토목공사의 현장에 등장한 것은 위안스카이가 지목하면서부터이다. 잔은 1905년 8월 징장철도 기공식 날 중국인들의 국가관을 흔드는 발언을 했다. “각자 배운 것은 다 내놓아라. 국가의 부강을 위해 사용하자. 외국인들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아야 지구상에 자립할 수 있다.” “중국은 큰 나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안에 다 있다. 길 하나 만들면서 외국의 힘을 빌리는 것은 국가적인 치욕이다.” 당당하면서도 가슴 벅찬 의지로 시작된 중국 민족철도의 건설 선언은 먼 훗날 중국이 고속철의 강자로 등장하는 단초를 만들게 된다. 민족철도 건설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보잘 것 없었던 작업도구를 사용하여 길을 닦고, 무거운 철강재를 얹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터널을 뚫어 나갔으니, 엄청난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구입자금을 노린 일부 인사들의 뇌물 공세는 잔을 어지럽게 했다. 베이징에서 장자커우까지는 지형이 복잡했다. 예산산맥도 뒤엉켜 있었다. 잔은 정밀한 측량이 없이는 불가능한 분단 시공을 선택했지만 보기 좋게 성공한다. 1092m에 달하는 바다링 터널을 포함한 5개의 터널도 뚫었다. 그러나 잔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조상의 분묘가 있는 황족과 조야의 세도가들이었다. 그들의 노선변경 요구를 무시하는 일은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더구나 칭허 연변에는 왕과 환관들의 묘가 즐비했다. 서태후 생부의 묘도 있었다.
잔은 그것들을 모두 모른 채하고 공사에 몰두했다. 이런 과정들이 알려지자 중국인들은 잔을 칭송하기에 이른다. 아무튼 징장철로(京張鐵路·베이징~장자커우)가 1909년에 완공되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 원래 예정된 기간은 6년이었다. 비용도 서양인이 산출했던 것보다 5분의 1에 불과했다. 국고 36만 냥을 절감했다.
2009년 중국 정부는 약 800조 원을 들여 철도 4만1000여 ㎞를 연장한다는 발표를 했다. 중국철로총공사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3년 기준으로 중국의 철도영업 총연장은 이미 10만㎞를 돌파했다. 이 중 고속철도 총연장은 1만㎞로 세계 최장이다. 12·5규획(12차 5개년 계획)에 따라 중국의 철도영업 총연장은 2015년까지 12만㎞에 달하게 된다.
최근 데이터에 의하면 중국의 철도 여객처리량은 20억 명이라고 한다. 하루 최대 여객량은 1000만 명을 넘는다. 중국의 철도건설 수요는 막대하다. 철도를 건설하고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유지비용도 엄청나다. 철도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철도 투융자 체계를 일대 혁신한다는 것이 시진핑 정권의 방침이고 보면 중국 발 철강수요도 제법 쏠쏠하다.
철은 이처럼 제조 산업뿐만 아니라 건설과 인프라 부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잔텐유 같은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사람에게 철강재가 활용될 때 더욱 가치가 발한다는 점을 역사는 이야기하고 있다.
국가가 어려움이 처하면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 국난을 극복한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는 중국인들처럼, 우리에게도 지금과 같이 철강 산업이 어려울 때 기운을 더해주는 위대한 철강 리더가 나타났으면 한다. ‘기운의 원천은 자신이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글귀가 다시 떠오른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