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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12)] 개화기 쇄국정책으로 철강산업 도입 기회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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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12)] 개화기 쇄국정책으로 철강산업 도입 기회 무산

영국의 스톡턴-달링턴간 철도.이미지 확대보기
영국의 스톡턴-달링턴간 철도.
조선시대 개화 초기에 선진 문물을 과감히 도입한 인물들 중에는 미국인 로웰과 미국주재 대리대사 이하영이 있다.

로웰은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1885년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The Land of Morning Calm)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방 국가에 소개한 최초의 저서로, 1986년에 천문학자 조경철 박사가 번역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란 말은 朝鮮(조선)이란 한자말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이 나오자 미국의 언론지 ‘데일리 익스애너미’는 조선을 “고려로 불리다 조선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고요한 아침을 의미 한다”고 보도했다. 이런 정겨운 표현은 ‘로웰’의 덕택이다.

로웰은 일본에서 여행과 집필에 몰두하다가 미국 주일공사 ‘빙햄’의 추천으로 조선 보빙사(답례사절)를 미국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보빙사 임무를 마치고 국빈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처음으로 사진기를 들고 와 고종의 사진을 직접 찍었다. 또한 민영익을 도와 미국 현지에서 전기불 도입 계약을 맺을 수 있게 주선했다.

로웰은 특히 민영익을 비롯한 8명의 보빙사 일행에게 철강 산업 생산 현장을 처음으로 견학시켰다. 민영익 등이 미국을 견학한 이후 한국 땅에 철강 산업을 접목시키지는 못했지만 철강 산업이 국가의 중대한 기반을 구축한다는 사실은 아마도 고종에게 어필 했을 것이다.

다른 한 사람, 철강 산업의 중대성을 한국에 일깨운 인물은 미국주재 대리공사 이하영이다. 그는 1884년 귀국길에 오르면서 미국에서 구입한 철도 모형을 직접 들고 들어왔다.

“미국의 드넓은 대륙을 가로질러 사람과 물건을 손쉽게 이동시키는 철도라는 것입니다.”

고종은 이하영이 들고 온 모형을 신기한 듯 살펴보았으나 대신과 귀족들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서야 저 혼자 굴러 갈 수 있단 말인가?”

철도 모형은 대신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했지만 미국을 둘러본 이하영은 서구 문명을 하루 속히 받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철도는 길이며, 다리이며, 이동수단이다. ‘많은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을 이하영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무지한 국가 대신들의 반응이 시원치 못해 국가 차원의 철강 산업이 즉각 도입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이하영은 여러 경로를 거쳐 한국에 철도를 놓이게 하는 기회를 맞는다.

연산군이 사냥을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놓거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길을 위해 배다리를 놓았던 것과 비슷하게 철도부설은 절대 시기상조가 아니었다. 이하영은 철도부설을 기획하면서 훗날, 고종의 아들 이왕이 압록강 철교를 보기위해 직접 신의주까지 갈 수 있게 한 단초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여하튼 이하영은 미국에서 철도의 편리성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철도의 역사는 1825년 영국의 스톡턴-달링턴간 철도 운행에서부터 시작된다. 5년 뒤, 영국에서는 리버풀-맨체스터 노선이 등장하여 본격적인 철도의 세계를 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브리티지스틸' 등의 철강기업들이 성장하고 무진장한 석탄산업이 활성화 되면서 영국의 철도산업은 날개를 달았다.

미국은 한 술 더 떴다. 1827년에 최초의 철도 회사인 '볼티모어 앤 오하이오사'가 설립되고 3년 뒤에 정상적인 운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결국은 영국과 미국이 동시에 철도를 개통한 셈이다. 이때가 1830년이다.

조선 보빙사 일행 8명이 미국을 방문 한 것이 1883년이었으니 약 50년의 역사를 지닌 미국의 철도산업이 얼마나 발전 되었는지는 눈먼 봉사도 알만한 일이다. 덧붙인다면 철도산업의 첫 주자는 영국이지만 철도망과 철도 기술은 미국이 영국을 앞질렀다는 점과 철도 기술의 모태가 된 공기 브레이크 장치, 곡선 구간에서 운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대차, 자동 연결 장치, 침대차나 고급 객차 같은 것들은 모두 미국 철도가 만들어낸 것들이다.

미국의 철도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1830년부터이다. 20년 동안에 미국(1850년)에는 무려 1만4500㎞ 이상의 철도가 놓였다. 그리고 매년 평균 3200㎞씩 증가했고, 1860년에는 4만8960㎞의 철도 노선이 운행됐다. 같은 시기 1만5000㎞에 불과했던 철도 종주국 영국 전체 노선의 세 배를 넘어 세계에서 최고의 운행 길이를 갖는 철도의 나라로 탈바꿈한 게 미국이었다. 이런 사실을 보고 들은 이하영은 철도야 말로 가장 우선해야 할 과제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하영이 고종에게 철도모형을 보여주었던 세월이 흘러 10년이 지났을 무렵, 조선에서는 서울-인천간 31㎞의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얻어내느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10년 전만 해도 고관대작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철도가 드디어 한반도에 가설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철도건설은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이하영의 손에서 미국인 ‘모리스’에게 허가 됐다. 이때가 1896년 3월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부설권이 넘어가자 움찔했으나 자금 조달에 실패한 ‘모리스’는 공사를 중단하고 불과 한 달 만에 철도부설권을 일본으로 넘겨줬다.

당시 조선인들은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몰랐던 왕실과 귀족들은 철도회사의 주식을 소유했지만 철도 부설을 우리 손으로 직접 해볼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중국이 철도를 부설 할 때 미국에서 공부한 책임자가 “배운 것 다 내 놓아라”고 호통 치면서 철도를 건설했던 이야기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당시 고관들은 철도의 부설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며, 미래를 책임진 막중한 사업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때까지 미국에서 유학을 경험한 학자나 리더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런 것은 늦었지만 경인선 철도의 부설로 인해서 철강 산업의 중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되고, 선진공법의 토목공사에서부터 석탄산업 그리고 대규모의 유통산업이 서서히 시작 됐다는 점에서 경인선 철도의 부설은 국가 경제를 일으킨 단초였다.

더욱이 철마가 달릴 수 있는 철도가 교량위로 가설된다면 한강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강과 산을 넘는 새로운 길들이 생긴다는 것과 압록강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가) 지구촌시대가 열린다는 점에서 철도산업은 열강들의 입맛을 한껏 돋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철도의 부설은 한국 땅에 철강시대가 열리는 신호탄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철강 산업 자체가 전무한 시대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전고를 올리고 청국으로부터 전승 배상금을 받아 ‘야하다제철소’를 건설한 것도 철강 산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테크노크라트들의 인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철도산업과 함께 동반 성장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토목분야이다. 교량의 건설은 철도부설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중에서도 대륙을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의 건설은 철강 산업의 발전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