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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철태만상(59)] 황제도 두려워한 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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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의 철태만상(59)] 황제도 두려워한 면도

10월 6일 오전 한국 P&G의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가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개최한 ‘질레트 퓨전 프로글라이드 실버터치’ 출시 간담회에서 모델들이 신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10월 6일 오전 한국 P&G의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가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개최한 ‘질레트 퓨전 프로글라이드 실버터치’ 출시 간담회에서 모델들이 신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빠른 면도사는 ‘게리 하리’이다. 게리는 1시간 만에 무려 982명의 수염을 깎았다. 그는 1983년 4월 28일 영국 길링엄의 한 이발소에서 안전면도 부문의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해 이 같은 솜씨를 뽐냈다. 지원자 한 사람당 364초가 걸린 셈이다.

면도는 철강 산업의 발전과 야금 기술이 발달하면서 남자들의 애용품이 됐다. 이제는 예전처럼 긴 칼로 구성된 면도 칼날을 들이대는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급할 경우 전동 면도기로 간단하게 아무 곳에서나 해결할 수 있는 요즈음이다.

최초의 면도는 고대 국가에서 제사 의식의 한 형태로 시작했다. 신에 대한 복종의 표현으로 수염을 깎았다. 인간의 열등함과 겸손을 신에게 보이기 위한 의식이었다. 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면도가 일반화된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군대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 부하들이 백병전을 치를 때 적에게 긴 수염이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수염을 자르도록 명령했고, 로마군은 적과의 식별을 위해 수염을 깎았다. 제정 러시아는 수염세를 징수하면서까지 국가가 나서서 수염 기르는 일을 통제했다. 표트르 대제는 칭기즈칸이 지배했던 풍습을 걷어내고 유럽과 같은 선진화를 위해 수염을 기르지 못하게 했다. 표트르가 직접 면도칼을 들고 대신들의 수염을 자르는 미술품이 아직도 남아 당시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11월(고종 32년)에 내려진 단발령과 함께 상투가 잘려나가는 일대의 변혁을 맞았다. 당시 김홍집 내각은 유길준과 정병하가 앞장서서 직접 가위를 들고 상감과 세자의 두발을 잘랐다. 물론 각부 대신들도 차례로 두발을 깎은 것은 물론이다.

수염 깎는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나타났다. 수염에 멋을 더한 것이다. 독일황제 ‘카이저수염’이나 ‘채플린 수염’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러나 문제는 면도칼의 이가 자주 빠져서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일이 자주 일어난 것이다.

나폴레옹도 무딘 칼로 면도할 수밖에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은 면도를 하다가 자주 얼굴에 상처를 입자 면도칼을 흉기로 생각하는 겁쟁이였다. 그래서 그의 면도사를 채용할 때 철저한 신원조사를 거쳐서 선발했다. 북한의 김정일도 그의 전용 이발사를 바꾸지 않고 20여 년이나 지속시켰던 일화가 전해진다.

목을 베는 공포의 면도칼이 사라진 시기는 18세기 이후부터다. 영국과 독일에서 질 좋은 면도칼이 속속 개발됐다. 강철로 만든 면도칼은 성능이 좋았다. 이가 빠지면 간단하게 날만 갈아 끼우면 그만이다. ‘킹 캠프 질레트’의 면도기 발명은 면도칼 시장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질레트는 병마개 제조회사 외판원으로 근무하던 중 한 번 쓰고 버리는 병마개에 착안하여 갈아 끼우는 면도날을 개발했다. 그 덕분에 미국인 남성들의 더부룩한 수염을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11월 한일공업(도루코의 전신)에서 처음으로 안전면도기를 만들었다.

현대인들이 면도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다. 면도를 한 얼굴은 경쟁보다 협동을 바란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져서 일종의 예의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면도한 얼굴은 표정은 또렷해서 의사전달이 뛰어나고 젊어 보이는 장점을 갖는다. 요즘은 아예 털을 제모하는 유행이 일부 젊은이들에게 번지고 있다.

철강 산업의 발달은 공포에 떨면서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만들었다.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


김종대 글로벌i코드 편집위원 jdkim871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