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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고향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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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고향의 숲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지난 주말에도 고향인 포천에 다녀왔다. 평소에도 고향을 찾지 않는 것은 아니나 올봄에는 유난히 고향 방문이 잦다. 고향의 풍경치고 정겹지 않은 것이 없지만 고향을 찾아갈 때마다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차창 밖으로 스치는 자연의 변화이다. 특히나 겨울을 견딘 초목들이 피워내는 꽃과 새순들이 시시각각으로 색깔을 달리하며 숲에 생기를 불어넣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고향을 오가며 연두에서 초록으로, 다시 초록이 녹음으로 짙어지는 숲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고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문정희 시인의 ‘신록’이란 시를 읽으며 고향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큰 복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고향이 멀어/ 슬픈 사람들에겐/ 뜻 없이 눈부신 신록의 날씨도/ 칼처럼 아프다/ 채찍처럼 무겁다// 고향은 만 리 밖/ 노자는 없는데/ 뜻 없이 계절은 신록이어서/ 미치도록 푸르게 소리 지르면// 고향에 못 가/ 슬픈 사람들은/ 온몸에 푸른 멍 든다// 풀 길 없는 강물에/ 두 눈 멀고 만다”(- 문정희의 시 ‘신록’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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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멀어 슬픈 사람들에겐 뜻 없이 푸른 신록마저도 칼처럼 아프고 채찍처럼 무거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겐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 내에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고향이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복인가 싶기도 하다. 고향 집 마당 가에 백목련이 일없이 피었다 지고 봄바람에 앵두꽃이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철나무 울타리를 따라 핀 노란 애기똥풀과 장독대 돌 틈 사이에 피어 있던 보랏빛 제비꽃과 흰 냉이꽃들…. 눈 감아도 선하게 떠오르는 정겨운 풍경이지만 올봄에는 그 풍경 속에 나를 끼워 넣을 수 있어 좋았다.

고향에 갈 때마다 나는 숲을 즐겨 찾곤 한다. 다양한 색깔의 영산홍과 분홍빛 꽃잔디가 다보록하게 피어 있는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쳐 인적 드문 산길로 접어들면 비로소 온전한 자연과 마주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온전한 식물들의 세상 속에 나를 끼워 넣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긴 듯한 안온한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산을 오르는 길섶에 피어난 자잘한 들꽃들과 바람을 타는 나뭇잎들의 찰랑거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더없이 편안해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봉분 위로 피어난 할미꽃과 조개나물꽃이라든가, 천천히 걷다가 숲속에서 각시붓꽃이나 큰꽃으아리를 발견하는 기쁨은 또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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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관리인이 죽은 후에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엘리스 빈센트가 쓴 ‘식물을 보듯 나를 돌본다’라는 책 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또한 “식물들을 각자의 방법대로 자라게 놓아두면, 자신들을 옭아매던 한계들에서 자유로워진다. 해충 방제와 가지치기의 통제가 사라지고 시든 꽃들은 그대로 남고 씨앗들은 자연의 방식대로 흩어지면서, 놀라움이 싹트고 뿌리를 내린다.”고도 썼다. 사람들은 동물은 물론 식물도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쏟는 만큼 잘 자라고 행복할 거라 믿지만, 식물들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과 무관하게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자란다. 그것이 식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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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들면 ‘만물의 영장’이란 오만에서 벗어나 인간도 다만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손길 없이도 스스로 자신들의 세상을 이루고 사는 숲의 나무들을 볼 때면 그들의 말 없는 삶이 일견 부러운 생각마저 든다. 평생 몸속에 나이테를 숨기고 사는 나무들은 오만을 모른다. 그 순하고 곧은 심지를 지닌 나무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모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둥글어지고 유순해진다.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짜증을 내고 투정을 하던 내 삶을 반성하게 된다. ‘나는 자연인이다’란 TV 프로그램에서 세상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산중의 삶을 택하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자연인의 삶을 택하긴 어려울지라도 삶에 지쳤다면 숲을 찾아가라 권하고 싶다. 숲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므로.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