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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동지 팥죽을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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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동지 팥죽을 먹으며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동지 팥죽을 먹었다. 11월 초순에 동지가 들면 애동지라 해서 팥죽을 먹지 않았다면서도 기어이 팥죽을 쑤어 밥상 위에 올린 것은 사랑이요, 정성이다. 귀찮음을 뒤로 하고 팥을 불리고 죽을 끓인 그 마음을 알기에 북극한파가 몰아친 추운 날씨에도 팥죽 한 그릇 비우고 나니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동짓날이면 어김없이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뿌리며 가족의 무탈을 빌던 어머니가 새삼 그립다. 팥의 붉은 기운이 액운을 물리치고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팥죽의 주원료인 팥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따라서 팥죽은 추운 겨울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영양도 풍부해서 건강식으로도 좋다. 어머니는 동지 팥죽을 먹으면 낮의 길이가 손톱의 반달만큼 길어진다고 하셨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 님 오시는 날에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이 되면 으레 읊조리게 되는 황진이의 시조다. 밤이 낮보다 밝다고 할 만큼 불야성을 이루는 요즘의 도시에서는 황진이의 시가 그리 감동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겨울밤은 유난히도 춥고 길었다. 뒷동산 늙은 소나무에선 부엉이가 처연히 울고 문풍지는 밤새 찬바람에 떨었다. 윗목에 떠다 놓은 자리끼에 살얼음이 끼고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마당으로 나서면 얼음장 같은 밤하늘엔 눈썹 같은 달이 떠 있곤 했다. 겨울밤 출출할 때 어머니가 화롯불에 데워 주시던 팥죽 한 그릇은 유난히 달고 맛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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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 중 22번째 절기인 동지는 한해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낮의 길이는 매일 조금씩 길어진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멀지 않은 법.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동지는 ‘작은 설’로 불리며 새해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인류 문화사에서도 동짓날은 생명. 태양의 탄생이라는 의미로써 중요한 의례일로 삼은 사례가 많다. 이처럼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얻은 지혜로 물처럼 흐르는 세월에 눈금을 그려 넣으며 삶을 성찰하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동지가 지나면 새해가 코앞이다. 다사다난했던 계묘년도 저물어간다. 늘 그랫던 것처럼 되돌아보면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게 더 많고, 성취감보다는 회한이 더 가슴을 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여도 어쩌겠는가. 흐르는 물 같은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것을. 성찰은 후회하고 자책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난 과오를 거울삼아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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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전할 때는 겨울 숲을 거닐어 볼 일이다. 잎을 모두 떨군 나목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가지마다 겨울눈이 돋아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깊은 잠에 빠진 듯 숲은 적요하기까지 하지만 숲은 침묵할 뿐 잠들어 있지 않다. 조선 시대 인파선사는 “樹樹皆生新歲葉 (수수개생신세엽) 花花爭發去年枝 (화화쟁발거년지)” 라는 오도송을 남겼다. 굳이 풀이하자면 “나무마다 새해 되면 새잎이 나지만 꽃은 언제나 묵은 가지에서 핀다.”는 것이다. 미리 준비한 자만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동지가 지나면 해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진다고 했다. 남은 날들이 노루 꼬리만큼 남은 세모의 끝자락이다. 이미 놓쳐버린 시간의 화살을 찾아 들판을 헤매기보다는 그동안 소식 없이 지낸 가까운 이웃들의 안부를 묻고 따스한 정을 나눈다면 보다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북극한파가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우리의 마음은 동지 팥죽을 먹은 것처럼 따스해 지리라.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