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트롤'의 함정인가, 공급망 현지화 압박인가…AI 메모리 주도권 시험대
이미지 확대보기무기는 '관세법 337조'…수입 차단이 목표
ITC는 지난 2월 17일(현지시간) 미국의 특허관리전문기업(NPE) 모놀리식 3D(MonolithIC 3D Inc.)가 제기한 불만을 공식 접수하고, SK하이닉스와 키옥시아의 메모리 반도체 제품에 대한 337조 위반 여부 조사를 개시했다. 관련 연방관보는 같은 달 20일 공시됐다. 대만 IT 전문매체 디지타임스(DIGITIMES)는 29일(현지시각) 보도에서 이번 조사가 단순한 특허 분쟁을 넘어 미국의 공급망 현지화 정책과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1930년 관세법 337조는 외국산 제품이 미국 내 지식재산권을 침해할 경우 수입 자체를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무역 수단이다. 일반 민사소송보다 처리 속도가 빠르고 실질적인 수입금지로 이어질 수 있어 파급력이 막강하다.
모놀리식 3D는 SK하이닉스의 HBM2E·HBM3·HBM3E와 3D 낸드플래시 전 제품군이 자사의 3D 적층 기술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침해 제품의 미국 내 수입을 봉쇄하는 '한정 제외 명령'과 이미 반입된 재고의 판매를 전면 중단시키는 '영업정지 명령'을 동시에 요청한 상태다. 키옥시아 반도체 대만법인(KIOXIA Semiconductor Taiwan Corporation)도 피소 대상에 포함됐다.
트렌드포스(TrendForce)에 따르면, 2024년 미국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 제기된 특허 소송의 약 80%가 모놀리식 3D와 같은 NPE에서 비롯된 것으로 집계된다. 업계 관계자들은 "NPE는 통상 대규모 합의금을 목표로 소송을 벌이며, 피소 기업의 수익이 클수록 공세 강도도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인 영업이익 47조 2000억 원을 기록한 직후 복수의 NPE로부터 소송 집중 공세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NPE 특허'의 역설…SK하이닉스가 10년 앞서 개발한 기술
이번 소송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특허의 유효성이다. 모놀리식 3D가 주장하는 특허 상당수는 2024~2025년 미국 특허청에서 발행된 비교적 최근 특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2013년 실리콘 관통 전극(TSV, Through Silicon Via) 기반 HBM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이력을 갖고 있다.
특허법의 '선행기술(Prior Art)' 원칙에 따르면, 이미 공개된 기술은 이후에 특허를 등록하더라도 그 특허의 효력이 제한될 수 있다. 반도체 특허 전문가들은 "SK하이닉스가 TSV 기반 HBM의 선구자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대거 제시할 경우, 모놀리식 3D의 특허 자체가 무효 또는 효력 제한 판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반대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특허 등록 시점이 선행기술의 실제 공개 범위와 다르게 판단될 경우 침해가 인정될 수 있으며, 엔비디아 AI 가속기 공급망의 급소에 해당하는 HBM이 수입 금지 대상에 오른다면 미국 AI 인프라 전반에 공급 충격이 발생할 수도 있다. ITC 행정법판사가 공공 이익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이번 사건의 또 다른 변수다.
수입금지보다 무서운 신호…"미국서 팔려면 미국서 만들어라"
전문가들이 더 주목하는 것은 특허 소송 그 자체보다 이 사건이 내포한 정책적 메시지다. 디지타임스의 루크 린(Luke Lin) 애널리스트는 "이번 ITC 조사는 반도체 제조사들이 미국 내 생산능력 확대 압박에 직면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고 진단했다.
ITC가 최종 결정 과정에서 반드시 검토하는 '공공 이익(Public Interest)' 조항은 미국 내 공급망 안정성, 소비자 후생, 국내 생산 기반 등을 종합적으로 따진다. 이 조항의 해석 방향이 곧 해외 기업들의 미국 투자 규모와 직결된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실제로 미국 내 메모리 반도체 생산 비중은 전 세계 물량의 2%에도 미치지 못한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Micron Technology)가 사실상 유일하게 대규모 미국 내 증설 계획을 이행 중이며, SK하이닉스와 키옥시아는 아직 미국 내 메모리 웨이퍼 팹(Fab) 건설에 대한 확정 계획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다.
만약 이번 소송에서 수입 금지가 현실화된다면, 가장 직접적인 반사이익은 마이크론에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와 특허 집행 강화 정책이 맞물리면서, NPE의 소송을 통한 외국 기업 견제가 구조적으로 강해지는 환경이 형성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SK하이닉스, 인디애나 패키징 거점·미 증시 ADR로 '투트랙 대응'
SK하이닉스는 법적 공방과 별개로 미국 현지 투자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고 있다. 인디애나주 웨스트 라파예트에 38억 7000만 달러(약 5조 8300억 원)를 투입해 짓는 HBM 첨단 패키징 공장은 지난 2월 23일 울타리 설치를 마치고 사전 공사에 돌입했으며, 4월 본격 착공을 거쳐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한다. 이 시설은 웨이퍼 팹이 아니라 HBM 후공정(패키징)에 특화된 것으로,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고객사와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전략 거점의 성격을 갖는다. 미국 인디애나 공장이 완공되면 SK하이닉스는 이천·청주·인디애나 3축 패키징 체계를 갖추게 된다.
자본 조달 전선에서도 움직임이 빠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4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ADR(미국주식예탁증서) 상장을 위한 등록신청서(Form F-1)를 비공개 제출했다. 연내 상장을 목표로 하며,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엔비디아 GTC 2026 현장에서 "ADR 상장을 통해 미국·글로벌 주주에 노출될 수 있는 더 글로벌한 회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미국 패키징 공장 착공과 ADR 추진이 트럼프 행정부의 투자 유치 정책에 부응하는 동시에, 이번 ITC 조사에서 '공공 이익 저해' 논거를 차단하는 방어막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키옥시아, 증설 행보에도 '미국 팹' 공백은 여전
일본 키옥시아는 이와테현 기타카미에 위치한 '팹2(Fab2)'에서 현재 8세대 218단 낸드를 양산 중이며, 이 공장은 키옥시아와 샌디스크가 공동 투자한 합작 시설로 지난해 9월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키옥시아는 샌디스크와의 협력을 이어 가며 332단(10세대 BiCS10) 차세대 낸드 기술을 공개한 상태이나, 구체적인 양산 시점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낸드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으로도 키옥시아는 미국 내 직접 제조 시설 건립 계획은 내놓지 않고 있다. 이 점이 이번 ITC 조사에서 SK하이닉스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ITC가 공공 이익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미국 내 투자 이행 여부를 간접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입금지가 현실화된다면…마이크론이 최대 수혜자
ITC 절차상 행정법판사는 증거 수집과 권고안 작성을 거쳐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피소 기업들은 통지서를 받은 날로부터 20일 내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통상 ITC 337조 조사는 12~18개월 내에 결론이 난다.
만약 SK하이닉스와 키옥시아의 HBM·낸드 제품에 대한 수입 금지가 현실화될 경우 그 파장은 광범위하다. 엔비디아 AI 가속기에 HBM을 공급하는 SK하이닉스가 직격탄을 맞는다면 미국 데이터센터 구축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동시에 마이크론이 반사이익을 흡수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이는 미국 정부가 반도체 공급망 내재화를 추진하는 방향과도 맞아떨어진다.
다만 이번 소송이 합의나 라이선스 계약으로 마무리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NPE 특성상 실제 수입 금지보다는 대규모 합의금 확보를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은 "SK하이닉스가 보유한 HBM 선행기술 증거와 미국 내 투자 이행 실적을 결합한 방어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번 ITC 조사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던졌다. 하나는 선행기술을 기반으로 한 특허 방어 체계의 정밀한 재구축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 내 현지 투자를 통해 '공공 이익 저해' 논리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AI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이 법정 공방과 공장 착공이 동시에 벌어지는 복합 전선 위에서 결판나고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