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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꼭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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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꼭 기억해야 한다

채명석 산업부 에디터 겸 선임기자
채명석 산업부 에디터 겸 선임기자
“죽은 사람을 기억해줘야 두 번 죽지 않는다.”

영화 ‘더 이퀄라이저2’에서 나온 배우의 대사 가운데 한 대목이다. 여러분과 함께 같은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 대사가 귀에 들어왔다.
3년 전, 2021년 3월 21일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의 20주기 기일을 맞아 제사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청운동 고인의 자택을 찾아갔을 때였다. 하루 종일 구슬비가 내렸던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의 여파로 다수의 사람이 모이는 것이 금지됐을 때다. 유족들도 시간을 나눠 차례로 제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다. 평소에 비해 기자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스크를 쓰고 구슬비를 맞아가며 조문객의 이름을 살피는 기자들이 여럿 있었다.

현장에서 기자들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갔다. “왜 제사 취재를 오는 것일까?”, “언제까지 제사 취재를 챙겨야 하는 것일까?” 처음 취재를 한 이들과 달리 기자는 고인이 별세한 2001년에 이미 기자를 시작했고, 이후 10여 년 기간 청운동과 한남동에서 취재한 경험을 통해 다른 답을 생각했다. ‘이제는 취재를 넘어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위인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잊히지 않기 위해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찾아가는 활동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위 영화의 대사가 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지난 3월 말과 4월 초 동안 재계는 조용히 추모의 시간을 보냈다. 정 창업회장의 23주기 기일(3월 21일)과 고 조양호 한진그룹(대한항공) 선대회장의 5주기 기일(4월 8일)이 떠오른다.

무엇보다도 3월 29일 대한민국 산업과 재계 민간외교에 큰 획을 그었던 고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오일장으로 치러졌다. 코로나19 확산을 전후해 재계는 총수의 장례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차원에서 삼일장으로 진행했으니, 오일장은 오랜만이었다. 기자는 빈소가 마련된 둘째 날부터 발인 전인 넷째 날까지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이 기간에 오너 일가는 물론 효성그룹 전현직 경영진과 임원들이 끊이지 않고 조문 행렬을 이어갔다. 재계 주요 그룹 총수들도 그랬고, 전현직 정부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 모습도 대부분 볼 수 있었다. 조문하는 이들을 취재하려는 언론사 기자들도 매일 당직 조를 짜서 현장에 모였다.

생전의 대기업 총수라고 하면 일반인은 쉽게 만날 수 없는, 큰사람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주요 병원 장례식장의 특실을 빈소로 이용하고, 수많은 조화가 늘어서 있는 장면도 낯설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장례식장 빈소 규모와 조문객 수를 생략하면 결국 마지막 길을 떠나는 한 사람을 추모하는 자리다. 추모해야 할 이가 일반인과 조금 다른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더 큰 일을 추진해 큰 성과를 거뒀다는 점 빼곤 다를 바 없다.
업무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대기업 총수와 최고경영자(CEO)들은 장례식장 조문을 반드시 챙긴다. 고인에 대한 예우를 최우선 덕목으로 한국 문화의 특성상 장례식장에 누가 오고 누가 오지 않았다는 소문은 곧 기업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다 보니 CEO들도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이번에 조문한 총수들 대부분은 오너 3~4세들이었다. 세대는 변화했지만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앞으로도 한국 재계에서는 이런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추신) 기자 개인적으로는 꼭 기억하려는 이가 있다. 2011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위해 세월호에 몸을 실었던, 비록 살아 오진 못했지만 수일 후 깨끗한 몸 상태로 돌아온 조카다. 벌써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