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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신록의 계절, 초록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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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신록의 계절, 초록의 유혹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신록의 계절, 초록의 유혹은 꿀보다 달다. 꽃들이 물러간 자리를 촘촘히 메우며 차오르던 연두의 시간을 건너온 나뭇잎들의 손짓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가까운 숲에서 바람에 실려 오는 아카시아꽃 향기는 가히 치명적이라 할 만큼 매혹적이다. 바야흐로 자연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무작정 꽃향기를 따라나선다. 싱그러운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숲으로 가는 길가에도 꽃들은 피어 해맑은 얼굴로 나를 반긴다. 노랑 애기똥풀은 지천이고, 풀꽃반지를 만들던 토끼풀꽃이나 가시덤불에 흰 찔레꽃도 한창이다.

처음 집을 나설 땐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대를 오를 계획이었으나 가는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오월의 숲에선 굳이 정상을 탐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이 목적이 아니라면 싱그러운 오월의 숲에만 들면 눈길 닿는 곳마다 볼거리, 즐길 거리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산 들머리에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순백의 쪽동백꽃이었다. 손바닥만 한 둥근 초록 잎 아래 조롱조롱 매달린 은종을 닮은 꽃들이 흘리는 이 맑은 향기라니! 배시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쪽동백을 만나고 돌아서려니 철 담장 너머 큰꽃으아리가 눈부시다. 꽃집에서 파는 클레마티스, 위령선이라고도 부르는 꽃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꽃이 큰꽃으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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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건너편 숲에는 아카시아와 등꽃이 한데 어우러져 골짜기 가득 꽃향기로 넘실거린다. 어느 봄날, 등나무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앉았다가 주렁주렁 피어난 등꽃을 보고 화려함을 감추기 위해 초록 그늘에 피는 의금상경(衣錦尙絅)의 꽃이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숲의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 당당히 아침 햇살을 쬐고 있는 등꽃을 보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같은 꽃이라도 어디에 피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사람도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달리 보인다. 보이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의 풍경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인 미셸 르 방 키앵 프랑스 국립보건의학연구소 소장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인간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외롭거나 우울하다면 집 안에서 머무는 것보다는 숲을 찾아가는 게 우울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숲 그늘이 짙어 올수록 초록의 품에 안기고 싶어진다.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은 오랜 세월을 두고 삶의 터전이었던 숲에서 깊은 만족을 느끼고 건강해지도록 프로그래밍됐다. 그래서 잠시만 초록의 숲에 머물러도 숲은 우리를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우울감을 덜어내고 기쁨은 배로 늘려준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그것을 바이오필리아(biophilia)라고 했다. 인간에겐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굳이 그런 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예쁜 꽃을 보고 화내는 사람 없고, 멋진 자연의 풍광 속에서 얼굴 찡그리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오랜 세월 인간의 삶의 터전이었던 자연, 숲은 인간에게 고향과 같은 존재이기에 언제나 넉넉하게 우리를 품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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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을 오르려던 계획을 변경해 우이천 계곡을 잠시 걷기로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롭게 마주할 꽃들에 대한 기대로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계곡을 내려오는 물소리가 마음을 다독이며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바위 위에 핀 매화말발도리나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국수나무꽃과 개울가를 따라 피어난 현호색과 산괴불나무꽃들, 꽃이 아니라도 초록의 나뭇잎을 단 나무들로 가득 찬 숲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이 맑아지는 듯 상쾌해진다. 온 산을 하얗게 갈아엎으며 짙은 향기를 바람에 실어 보내는 아카시아 숲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쥐똥나무꽃을 보았다. 자잘한 흰 꽃송이들이 짙고 그윽한 향기를 제게 허락된 허공만큼 풀어놓고 있다. 그 향기는 욕심내지 말고, 안분지족의 삶을 살라는 쥐똥나무의 향기로운 전언처럼 느껴진다.


백승훈 시인